[최창근의시편지] 세상의 모든 집으로 가는 길
[최창근의시편지] 세상의 모든 집으로 가는 길
  • 북데일리
  • 승인 2008.04.3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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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진 <나는 궁금하다>(문학동네, 2002)

추억, 그것은 끝나고 싶어 하지 않는 꿈의 이미지이다 . . .

길들은 세상이 아직 제 모습을 갖추기 전의 얼굴을 그려줄 때가 있다 . . .

자신에서 자신에게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다른 사람을 통해 가는 길이며, 우주를 통해 가는 길이다 . . . - 피에르 쌍소, [바람 부는 길에서] 중에서

[북데일리] 병호에게.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를 떠난 이스탄불 행 야간열차는 지금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달리고 있어. 저녁 9시쯤 기차에 올라탔을 때는 바깥이 제법 환했는데 금세 어둑어둑해지더니 곧 캄캄해지더구나. 이젠 밤하늘에 뜬 초롱초롱한 별들과 눈이 시도록 푸른 초승달만이 우리 일행을 외롭게 지켜주고 있네.

영화감독과 극작가 겸 연출가 그리고 연극배우로 구성된 이번 여행의 동행은 가는 곳마다 주위의 시선을 끌고 있단다. 처음 머물렀던 아테네에서는 파르테논 신전과 에게 해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유적의 건너편 뮤즈의 언덕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상대로 작은 노래 공연을 벌이기도 했지.

<가고파> 같은 가곡이나 성격이 다른 가요들인 <아침이슬>, <님을 위한 행진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갈까보다>에 이르는 민요 심지어는 김소월의 시 <초혼>까지 아주 다양한 레퍼토리들이 저절로 터져 나와서 우리 스스로도 놀랐단다.

우리가 여장을 푼 침대칸의 옆 칸에 우연히도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터키로 들어가고 있던 한국인 박형욱 씨가 타고 있었어. 그와 함께 그리스의 전통 술인 우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참동안 수다를 떨었지.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갑갑해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무작정 여행길에 올랐다는 그의 이야기에 실내는 잠시 숙연해졌단다.

박형욱 씨를 위로하고 새로운 선택을 축하해주기 위해 영화를 찍는 우열과 춤과 소리를 겸비한 팔방미인인 배우 말복은 아테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래를 불러주었고 나는 노래 대신 시 한 편을 읊어주었단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왔던 두 권의 시집 중 한 권에서 고른 시였는데 그 시는 병호 너도 잘 알고 있는 작품이야.

이 길 끝에 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집을 떠날 때 밝은 아침이면 좋듯 돌아갈 땐 아주 어두운 밤이라도 좋지. 창 밝힌 집, 밤공기에 숨어, 숨은 냄새에도 추억은 있지. 이제 집에 닿아 불빛 환한 방문을 열면, 거기 지나버린 시간이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흙 마르는 냄새 불빛보다 먼저 나오고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그때처럼 나를 본다면, 그렇다면, 익숙한 높이로 몸을 낮춰 방으로 들어가 늘 앉던 자리, 하얗게 쌓인 시간 위에 앉아 떠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지. 불을 끄면 별과 달빛으로 밝혀지는 방문, 세상은 다시 그때처럼 방을 향해 불을 밝히겠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마음

안과 밖, 경계 사라진 한없이 넓은 마음에

그리움이라 해도 좋을 것들을 그 하나를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와 눕는 내 마지막 집이여

이 길 끝에 집이 있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 전남진, <마지막 집> 전문

그래. 몇 년 전이었던가? 내가 너의 집에 놀러갔을 때 책장에 놓여있던 전남진 시인의 시집. 지금은 모두 다 부러워하는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산원이지만 너도 한때는 시를 좋아했던 문학청년이었잖아. 너를 통해 나는 전남진이라는 좋은 시인을 알게 된 거지.

후배 우열이 한 편 더 읽어달라고 재촉해서 <산촌의 밤>이라는 시를 들려줬는데 두 편 다 여행자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어서 우리는 술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하고 인생에 취하고 . . . 밤은 깊어가는 데 가끔씩 길게 여운을 남겼다가 사라지는 기적 소리에 맞춰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더구나.

전남진 시인의 독자들은 <마지막 집>이나 <산촌의 밤> 외에도 <뒤돌아보면 아프다>나 <가로수를 심는 노인>, <이십대 마지막 아내> 같은 시들을 좋아한다더라. 전 시인은 2002년 봄에 첫 시집을 낸 후로 아직까지 두 번째 시집을 묶지 않고 있어.

그 대신 [어느 시인의 흙집 일기]나 [아빠랑 시골 가서 살래], [천상병(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간 시인)] 같은 산문집들을 꾸준하게 발표하고 있는데 앞의 책에 실린 글들은 딸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하면서 얻어진 결과물들이라네.

결국 시인의 생애 역시 자신이 쓴 시처럼 흘러가게 되는 걸까. 전 시인의 시 <마지막 집>의 마지막 구절 “이 길 끝에 집이 있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처럼 어쩌면 인간은 길 위에서 또 다른 세상의 집을 찾아 끊임없이 떠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네. 우리 일행이 탄 기차 역시 잠시 후면 그리스 국경을 넘어 터키라는 또 다른 세계의 집을 향해 질주해가겠지.

나는 지금 길 위에 있고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는지는 나 역시 모르고 있듯이 . . .

* 편지 왔어요-답신 3 *

목련나무 한 그루

꿈속에서 활짝 꽃피웠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밤새도록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불어가는 저기 저쪽은

비 맞은 나뭇가지들이 뚝 뚝

부러진다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목련나무 한 그루

화안하게 밝았다

내 마음은 점점 어두워진다

- <목련나무 한 그루> 전문

[극작가 최창근 anima69@empal.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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