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사건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사고와 감정, 직관과 감각을 활용한다는 것이 논지다. 융은 사고와 감정은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기능이라고 보았고 직관과 감각은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엇을 감지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이중에서 한국인들에게 유달리 강하게 드러나는 태도는 감정과 감각이다. 감정 기능은 어떤 사물의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객관적인 가치가 아닌 자신의 관점에 따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단다. 감각 기능은 모든 감각 기관에 의존해 사물을 수용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이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한국인들이 현실적이면서 실용적이고 공과 사 중에서 사를 좋아하는-공적 관계나 공교육보다 사적관계나 사교육을 선호하는-걸 보면 대충 맞는 것 같다.
반대로 우리 교육의 목표는 사고와 직관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우선 각 대학들은 대학별 고사라는 이름으로 통합 논술 시험을 강화하고 있다. 대학들은 논술 시험에서 글쓰기 능력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을 가려내겠다고 한다.
기본서-판례집-문제집 포함해서 12900 페이지를 외워야 합격할 수 있다는 사법 고시가 언어 이해 능력과 논리적 추론 능력을 따지는 LEET 시험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상도 그 증거다.
비록 지금은 영어 몰입 교육에 밀려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느낌이 있지만 우리 교육은 토론과 글쓰기 중심으로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가야 맞다.
오늘의 주제가 문제 해결 능력이다. 공부 잘 한다고 해서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외무고시에 수석 합격했고 개인적으로 친한 고시 스타 강사 황남기가 지난해부터 로스쿨 논술 강사로 변신한 사연은 이 문제 해결 능력과 상관이 있다.
돈 되는 고시 시장을 버리고 불투명한 로스쿨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한국 사회 엘리트에 대한 환멸감과 엘리트들을 만들어낸 시험제도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이랬다.
그가 볼 때 한국 사회 최고 엘리트들의 문제는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는 현대사회 문제들이 고시 수험서에 적힌 패턴대로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법전의 암기가 아니라 각종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인데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능력 자체가 부족한 이들이 판사 검사가 된다고 해서 없던 문제 해결 능력이 생기겠냐고 따진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문제라고 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기술이라면 훈련이나 연습으로 터득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이 책 <공부의 신들도 모르는 문제해결의 기술>(삼성출판사. 2008) 저자 와타나베 겐스게는 그렇다고 한다. 저자는 일본인이지만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식 합리주의 문화에 오래 노출된 그는 얼마 전 독립해 델타 스튜디오라는 미디어 회사를 차렸고 중고등 학생들에게 문제 해결 능력을 가르치고 있다.
문제 해결이란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효과적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낸 후, 실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 성적이 떨어졌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무슨 문제를 틀렸는지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실행하면 된다.
말이 쉽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행보다 어려운 것이 제대로 된 원인 분석이다. 원인을 제대로 찾으면 그만큼 빠른 시간에 문제를 해결할 확률은 높아진다.
저자는 분해 나무를 활용해서 ‘예/아니오’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원인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일종의 마인드맵을 활용해 과정을 차트화 하는 것이다. 그는 과제 분석 시트를 만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제를 해결할 때 구체적인 목적 없이 정보를 수집하거나 분석을 하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까지 모으게 된다. 쓸데없는 정보가 많아지면 머리만 더 복잡해진다. 과제분석 시트에는 가설과 근거 분석 작업과 정보원 등을 적는다. 종이에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는 이점이 있다. 정말로 필요한 일만 효율적으로 골라서 할 수 있다.
틀린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보자. 먼저 시간이 없어 못 푼 문제, 풀었지만 틀린 문제로 나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풀었지만 틀린 문제다. 여기서 푸는 방법을 모르는 문제와 다른 이유로 틀린 문제로 나눈다.
푸는 방법을 모르는 문제는 애초에 기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문제, 아니면 기본 개념은 이해했지만 응용력이 부족한 문제로 나눈다. 이처럼 왜 라는 질문을 되풀이해서 던지면서 틀린 문제를 분석해가는 동안 문제를 풀지 못한 원인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원인을 찾을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찾아야 하고 원인의 가설을 세운 뒤 분석 방법을 정하고 정보를 모아야 한다. 원인을 분석할 때 해결 방법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게 합리적이다.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시간과 돈 인력이 정해져 있으므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효과가 클 것 같은 일부터 우선순위를 정해서 해야 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을 선택할 때 저자는 얼마나 실행하기 쉬운 방법인가와 얼마나 효과가 큰 방법인가를 기준으로 매트릭스를 만든다. 매트릭스와 과제 분석 시트의 장점은 일목요연하게 문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 방법을 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귀띔한다. 역시 가설이 중요한데 선택의 가짓수를 폭넓게 찾은 뒤 범위를 좁혀가며 효과적인 가설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가설이 참인지 확인해야 한다. 분해 나무처럼 가설 나무를 제시하는데 이는 가설의 결론과 근거를 명확하게 분류해 시각화하는 방법이다.
요즘 합리적 의사 결정 모델이 논술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고 있는데 그는 의사 결정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명쾌한 솔루션을 제안한다. 좋은 점과 나쁜 점 리스트(일종의 기준이 되겠다)를 만든 뒤 각 항목을 3단계로 평가하는 것이다. 평가 기준에는 중요도가 매겨져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세계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제를 발견해서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한국 교육은 그것이 부족하다. 아니 없다. 학생들에게 적잖은 부담이 되지만 논술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그 능력이 논술 시험과 그에 대한 대비 과정에서 체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술 능력은 개인적으로는 수시 입학을 결정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미래의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