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시편지] 룰-루-랄-라 팜 파탈 환상여행기
[최창근의시편지] 룰-루-랄-라 팜 파탈 환상여행기
  • 북데일리
  • 승인 2008.03.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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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

. . . 일상에서 ‘만일’이 허구라면 연극에서 ‘만일’은 실험이다. 일상에서 ‘만일’이 도피라면 연극에서 ‘만일’은 진실이다 . . .

- 피터 브룩(1925- )

나마스떼.

이듬 씨.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오랜만이에요. 이듬 씨가 사는 아름다운 고장 진주에 한 번 놀러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 못 가고 이렇게 또 해가 바뀌었네요. 그렇지만 멀리서나마 소식은 듣고 있어요. 작년에 출간된 나온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시집도 틈틈이 보고 있고요.

저는 얼마 전에 인도에 다녀왔습니다. 아마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길 좋아할 것만 같은 이듬 씨는 이미 오래 전에 발자국을 남기고 온 곳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두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 <오토릭샤맨>이나 <추억은 파리>, <타블라>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들이 탄생한 거겠지요.

이듬 씨의 시들을 따라 가다가 예기치 못한 한 순간 쿠쿠쿡, 하고 장난스럽게 웃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아라비아 해 어딘가를 열심히 항해하고 있을 이 지구별의 모든 쿡크 선장이나 말괄량이 삐삐처럼 이듬 씨 특유의 독특한 표정과 친근한 말투가 떠올라서요.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은 왠지 모를 애틋함에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했고요.

가령 <투견>이라는 시에서 시인 자신인지, 시적 화자인지 그도 저도 아닌 제 삼자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누군가가 아주 능청스럽게 “싸워야 밥을 얻어먹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되뇌며 “떠나고 싶은 동물들과 떠나길 무서워하는 동물들/사이에서/나는 비탄도 기쁨도 없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마음과는 영 다른 엉뚱한 말을 할 때 그 마음이 시침을 떼야만 하는 몸의 언저리 혹은 몸의 얼룩을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레일 없는 기차>와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왼손잡이>,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일주일> 같은 시편들을 어느 낯선 나라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해질녘 문득 불쑥 찾아온 영감처럼 천천히 받아 안습니다. 약간은 당황스럽게, 조금은 수줍은 듯 그러나 뒤늦게 찾아올 각성을 아프게 견디며 참으로 황홀하게.

화제가 된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에도 선연하게 찍혀있는 <거리의 기타리스트>나 <봉인된 여자>, <가릉빈가> 그리고 <청춘이라는 폐허 2>, <가내공업> 또 줄줄이 연결되는 <나는 내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시소>, <불안한 재미> 같은 시들을 연극배우처럼 소리 내어 읽고 났을 때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남게 되는 강렬한 잔상들이 제 마음을 어지럽히고 때로 슬프게 만듭니다.

‘내’가 ‘나 아닌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할 때면 늘 그러하듯이 작품 곳곳에서 슬쩍슬쩍 묻어나는 차압당한 가족사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그려내는 묘한 곤혹감에 사로잡혀 아주 오래 눈길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집’ 혹은 ‘가정’이라고 부르는 끈끈하고 농밀한 관계의 뒤편에 폐허처럼 방치돼 있는 기억의 조각들 혹은 이상한 그리움들 말이에요.

시집의 첫 장이나 끝 장에서 독자를 안내하는 ‘자서’나 ‘시인의 말’은 작가의 자서전과 다름없기에 참으로 신비롭지요. 언젠가 그 내력에 대해 들었던 ‘이듬’이라는 필명이 본명보다 더 시인의 운명을 예지하고 앞길을 밝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두 권의 시집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버려진 아이들, 갇힌 동물들과 병중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울어주지 못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 아, 그리고 유서나 유언을 쓰듯 이런 말도 남깁니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최근의 작품 <12월>의 말미에 이듬 씨가 덧붙여놓은 것처럼 어쩌면 “모자라는 건 결핍이고 넘치는 것은 다재다능함”이겠지요. 아니면 오히려 “넘치는 것이 결핍이고 모자라는 건 다재다능함”일까요?

2006년 여름의 <서울 퍼포먼스>는 따분한 추억처럼 끝이 나고 어느덧 무대에 <막>이 내리면 거기 한 일본 극작가의 전언처럼 외로운 세상을 뒤덮는 무서운 그물이 드리워지는 것이겠지요.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복수일지 모른다.”

다시, 여행을 떠나는 날 연락드릴게요. 아프지 말아요 . . .

<안나푸르나, 두 겹의 크로키>를 떠올리며 샨티, 샨티, 샨티.

* 편지 왔어요-답신 2 *

처음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을 찾아 헤매길 수십 년 나는 그 때마다 빛의 속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밑도 끝도 없는 저 뭇별들의 아득한 거리를 내 몸을 자루 삼아 집어 던졌다가 놓아 버렸다가 그렇게 날마다 시비를 거는 장난도 재밌었다 내 집은 어디 있지 어디로 도망간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꿈조차 꾸어본 적 없지만 별과 별 사이 점점이 흩어진 콩 점이나 떡 점은

- <우주여행 . . . 우주에서 집짓기> 전문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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