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희곡나라]⑤올 신춘문예희곡
[장정일의희곡나라]⑤올 신춘문예희곡
  • 북데일리
  • 승인 2008.03.17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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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올해도 어김없이 신춘문예 당선 희곡집이 나왔다. 이름 하여 <2008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월인/ 2008). 1999년부터 동 출판사에서 독점적으로 출간되어 온 이 작품집은 올해로 벌써 열권 째가 되었다.

이번 작품집에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3개 중앙지의 당선작 3편과 3개의 지방지에서 당선된 4편의 희곡이 함께 묶였다. 차례대로 7편의 작품을 통독한 소감을 말하자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달까?

책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인 이진경의 <리모콘>은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을 중심축으로 하고, 애완견을 잃어버린 독거노인의 일화를 부차적인 줄기로 삼는다. 결혼 전이나 후나 외동 아들을 끼고 살면서 갓 들어온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방패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젊은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어 원치 않는 위선자 노릇을 해야 하는 남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면서 항상 되풀이 되는 드라마 소재다.

미리 말한 것처럼 <리모콘>의 작가는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에다 애완견과 함께 사는 독거노인의 일화를 삽입하여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그리며 동시에 진행되도록 했다. 이런 고안은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이란 소재가 진부하다고 느낀 작가의 고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내가 발견한 진부함은 결코 소재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리모콘>이 진부한 것은 고부갈등이란 문제를 푸는 작가의 시각이 너무 안이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 연속방송극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서 찾아온 고부간의 휴전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거짓 화해로 버무려지고 마는 신빙할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KBS2 텔레비전의 인기 방영물인 <사랑과 전쟁>의 밀도에 미치지 못한다.

두 번째로 보게 된 엄현석의 <개>는 카프카의 <심판>처럼 주인공에 닥친 부조리한 재판과 자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진창같은 상황이 극을 이끌어 간다.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인 주인공은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눕기도 전에 흉악범으로 고소되어 끝내는 재판을 받고 죽는다.

까닭은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자신을 보고 짓는 개를 발로 차서 맨홀에 떨어트려 죽였기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한 역설과 우의는 간단명료하다. 오늘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존재라는 것.

작가는 주인공이 고소당하여 구금되는 순간부터 방송사의 여기자를 판사와 함께 동반케 함으로써 자칫 단선적으로 진행될 사건을 중층적으로 구성하는 효과를 얻었다. 다시말해 극을 진행하고 사건을 해석하기도 하는 실황중계는 단순한 극을 풍성히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볼거리로 만들고 여론을 일정한 방향으로 조작하는 언론 권력과 그것에 의해 왜소해진 현대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수준이 과연 이런 해석을 선사받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금세 부정적이 된다. 진부하기로 따지자면 ‘아무 죄 없는 소시민이 당하는 부조리한 재판’이란 주제는 <리모콘>의 고부갈등보다 더 식상하다. 작가는 이 주제에 억지와 빈 웃음 말고는 아무런 새로운 차원을 덧보태지 못한 채 평이함에 머물렀다.

이어지는 조연미의 <꿈꾸는 심해어>는 희곡을 쓰는데 있어서 ‘연극언어’가 아닌 ‘문학언어’에 많이 기울어진 작품이었다. 희곡도 문학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희곡은 ‘문학언어’와는 또 다른 ‘연극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연극언어’는 ‘문학언어’보다는 더 현실과 밀착해 있으며 극적 행동을 유발하는 힘을 가진다. <꿈꾸는 심해어>의 대사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투로 작성되어 있으며, 상징주의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연극성보다는 문학성이 강한 ‘읽는 희곡(Lesedrama)’인 까닭이다.

별 다른 행동 없이 지루하게 연속되는 두 사람의 대화로 시종하는 박철민의 <문상객담問喪客談>은 시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현실 풍자와 고사(古事)로 범벅되어 있어 정작 어느 부분이 작가의 육성인지 모호할 수밖에 없고, 언술의 독창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만큼 작품의 전언도 평범하달 수밖에 없다.

하긴 이런 한계는 이 작품만 아니라 모든 골계적인 현실 풍자극에 공통된 난점이다. 희곡은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건만 희곡을 처음 쓰는 ‘초짜’들이 종종 드러내는 희곡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류의 글을 희곡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이 없으면 갈등이 없고 나아가 절정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양구의 <별방>은 최인훈이 자주 구사했던 어눌함과 여백을 닮고자 했다. 최인훈이 그랬듯이 <별방>의 작가 또한 설명을 생략하거나 산문적인 전개보다는 시적인 비약을 선호하고 있다. 주인공인 남자는 바위를 들추고 과거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부모와 재회한다.

하지만 그 남자 주인공이 부모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고 떠났는지는 못내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했던 동기도 희미하게 처리되었다.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에 드리운 불행한 범죄와 패륜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용서하는 부모의 내리사랑이다.

작품에 여백을 심는 것도 극작의 기술이다. 온전히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에게 더 많은 것을 암시하거나 작품을 풍요롭게 하는 여백은 그 자체로 작품의 한 부분이지만, 작가 자신도 납득할만한 설명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이거나 독자가 미루어 짐작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여백은 작가의 책임회피거나 겉멋 부림에 불과하다.

정서하의 <카오스의 거울>은 극작의 기본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이 등장인물이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을 작가는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 이래로 극중의 정신과 의사는 나레이터역을 겸하는 전통이 세워진 듯, <카오스의 거울>에 나오는 닥터 민도 관객에게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고한다.

극 진행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해설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편법이라는 것을 감안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환자의 면회객이나 동료 의사나 간호원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는 비연극적인 어색함을 피할 수 있다.

신인 작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작품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상의 작품들을 보면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싶다. 이런 수준이라면 신춘문예 희곡부문이 지속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극작법에 대한 기본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자신이 쓰고 있는 주제에 대한 치열한 의식도 발견할 수 없는 이런 작품으로 등단을 해본들 얼마나 길게 극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0여 년째 신춘문예 희곡 당선집을 보면서, 좋은 재원들은 소설이나 시로 다 빠져나가고 희곡은 ‘문학 저능아’들만 남아있는 장르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김지용의 <그 섬에서의 생존방식>은 그런 절망감을 깨끗이 씻어준 수작이다. 이 작품은 2006년 당선작이었던 김은성 <시동라사> 이후로 가장 내 눈을 잡아끈 작품이다. 작가는 ‘연극언어’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 그 위에 현실과 대결하고 세계를 포착하려는 대담한 의식을 갖추었다.

이 작품은 무의미한 듯한 말놀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강타한다. 또한 이 작품은 희곡은 절약과 재사용이란 덕목이 중요시되는 경제적인 장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며, 야구경기처럼 긴장을 점차 구축해가는 계산된 장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희곡부문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소설이나 시 분야의 당선자들보다 생존율이 많이 떨어진다. 당선작이 마지막 작품이 된 작가들이 희곡분야에는 많고, 작품을 계속해서 쓰는 경우도 소설가나 시인만큼 발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극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시작은 변변치 못했지만, 끝은 장대하기를!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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