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쌤의논술돕는책] 강남 좌파, 박노자에 열광?
[신쌤의논술돕는책] 강남 좌파, 박노자에 열광?
  • 북데일리
  • 승인 2008.03.0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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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2001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펀드 매니저로 십 억 원 대의 연봉을 받고 있던 친한 대학후배와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도 돈 이야기만 할까? 적어도 그 후배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 이야기와 요즘 읽고 있는 책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졌는데 그 후배는 요즘 박노자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그의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고 통쾌하더라’라는 이야기였다. 같이 술을 마시던 다른 사람들도 박노자라는 이름이 나오자 상찬을 덧붙였고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필자만 대화에 끼지 못해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필자는 한겨레신문을 대학 시절에는 열심히 읽었지만 직장에 들어와서는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박노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랬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나를 제외하면 그날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지역적으로는 모두 강남에 살고 소득수준으로는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은 떨어진다.

얼마 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그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는데 2년 뒤 신문사를 그만 두고 압구정동의 논술 학원에서 일을 할 때 그 책을 읽었다. 당시 수능등급제가 발표되고 논술의 중요성이 부각된 첫 해라 청담동과 압구정동에서 가장 잘 살고, 공부 잘 하는 예비 고 1학생들이 겨울방학 기간 중 독서 논술 수업을 듣고자 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수업은 강준만 교수의 <대중문화의 겉과 속>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벌인 토론 수업이었다. 특히 박노자의 책을 읽은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발표를 했고 그의 책을 계기로 논술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압구정동만이 아니었다. 대치동의 아이들도 박노자의 글을 정말 좋아했다.

수업 시간 중에 좋은 글을 골라 학생들과 함께 윤독을 하는데 가장 많이 읽힌 글이 박노자였다. 그의 글을 몇 번 읽은 학생들은 나중에는 첫 단락만 읽고도 그게 박노자의 글인지 금방 감을 잡았다. 심지어 아무 정보가 없이 제시문에 쓰인 박노자의 인터뷰 기사에서 인터뷰이가 박노자임을 눈치 채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글의 스타일뿐만 아니라 글에 담긴 생각에까지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강남 외의 지역에서는 박노자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열광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흔하게 볼 수 있어서 그의 글이 더욱 실감나고 남 이야기 같지 않았을 터인데도 그 지역 학생들은 박노자의 글에 강남 학생들만큼 열정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노자 하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힐 정도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인데 왜 강남의 학생들과 부자들이 그의 글을 더 선호하는 걸까?

해답은 강남 좌파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강남 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라는 뜻인데 생각은 좌파, 진보적으로 하면서도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버릴 행동은 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생각만 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나토족(No Action, Only Talk)과도 유사하다.

지난 번 칼럼에서 들뢰즈의 말을 빌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욕망의 이중성 때문에 분열증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우리 주위에는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이 분열된 사람들이 정말 많은 듯하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욕하고 사교육 때문에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교육의 폐해를 부르짖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경험이라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박노자에 열광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좌파라기보다는 강남 좌파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중에는 열심히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주말에 반자본주의적인 책을 읽으며 양심선언, 내지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중에는 샤일록 뺨칠 정도로 탐욕적인 삶을 살다가 주말에는 장자의 책 속에서 자연친화적 삶을 지향하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강남의 청소년들은 왜 박노자에 열광하는 걸까? 이들에게는 강남 좌파라는 레테르를 붙이기 어려운 게 아닌가? 이들이 박노자의 책을 읽고 행동으로 뭔가 달라진 게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잠재적 강남 좌파, 나토족이다. 이들이 어른 강남 좌파와 다른 점은 분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는 돈 벌려고 공부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다.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라는 강사의 말에 좋아하는 것을 돈 버는 것에 맞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누구보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박노자의 글이 이들에게는 가장 재미있고 세련된 고급문화 상품이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 박노자의 글은 빠르다. 이번에 나온 <박노자의 만감일기>(인물과사상사. 2008)는 한겨레 블로그에 실린 구어체 글들을 손을 본 뒤 문어체로 출간했다. 대부분 노르웨이에서 인터넷 서핑을 통해 얻은 한국의 소식들을 바탕으로 쓴 글들인데, 그의 글의 갖고 있는 소재의 시의적절성은 이곳 언론의 논설위원보다 몇 수 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박노자는 하루의 40% 정도를 컴퓨터 화면 앞에서 보내는데 그중에 10~20%를 인터넷 검색에 사용한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 가독성이다. 그의 글은 어렵지 않고 정말 잘 읽힌다. 박노자는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글을 풀어가는 스타일인데, 흡인력과 전달력이 정말 대단하다. 그는 정말 독자를 배려하고 글을 쓰는 친절한 작가다. 이런 노력이 그의 글이 갖고 있는 논증의 힘의 배경이 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논거를 자신의 경험과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등에서 찾으려고 한다. 독자에게 처음 전달하는 새로운 사실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배경지식의 스키마와 또 한 번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소설도 아닌데 읽고 나서 책 내용이 영화처럼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박노자가 아닐까 싶다.

세 번째 이유, 감각이다.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니까 대부분 제목을 그가 직접 달았을 터인데 제목 다는 솜씨는 거의 예술에 가깝다.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남이 하면 우경화, 우리가 하면?’ 같은 제목은 어떤가?

참고로 목차를 보면 블로그에 산재해 있는 글들을 나→우리→국가와 민족→세계 하는 식으로 확장을 하며 범주화했는데 개인-사회-국가-세계 등 각 단계에서 경계를 허물어 다른 주체와 상호 소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경계 허물기는 귀화인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적 정서에서 박노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것이 좌파가 됐든 우파가 됐든 지나친 민족주의, 집단주의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남좌파들에게는 유달리 강하다. 박노자는 남한의 우월적 민족주의와 북한의 폐쇄적 민족주의 모두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강남좌파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그에게서 느끼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의 글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보다 그의 글을 통해서 개인의 소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 역시 강남 좌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박노자의 글은 본인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와인과 함께 마르크스를 논했던 80년대 누구처럼 고급스럽게 소비되는 경향이 분명 있다. 물론 강남 좌파가 그에게 열광한다고 해서 그의 글이나 생각의 가치가 폄훼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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