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이런일이] 조선판 스타강사 ‘정학수’, 노비가 양반 가르쳐
[책속에 이런일이] 조선판 스타강사 ‘정학수’, 노비가 양반 가르쳐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6.05.03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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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엔터테이너> 정명섭 지음 | 이데아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엄격한 신분제 사회 조선 시대, 노비가 양반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조선판 스타강사 ‘정학수’의 이야기다.

본래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는 수복(守僕)이었다. 노비 신분으로 성균관과 반촌에 서당을 세우고 양반가 자제들을 가르쳤다. 노비 스승이라니, 신분 사회에서 평생 꼬리표로 따라붙을지 모르는 문제임에도 부모들은 자식들을 정학수 서당으로 보냈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세운 서당의 규모는 사극에서 봤던 거처럼 자그마한 문간방이나 대청마루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강당이 있었고,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알리기 위해 경쇠라는 작은 종이 울렸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제자들 중 성균관에 입학해 과거에 합격한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분을 뛰어넘을 교수 실력,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노비였던 그가 양반가 자제를 가르치는 스승이 된 데에는 독특한 환경적 요소도 있다.

그는 성균관 일을 도맡아 했던 노비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반촌(泮村)에서 생활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개성에 있던 성균관은 새 도읍 한양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때 성균관 노비들도 함께 따라왔다.

이 반촌에 거주하는 노비들은 반인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집단이었다. 일단 이들의 자손들은 무조건 성균관에서 일해야 했다. 노비 신분인 데다 개성에서 온 이방인이었던 탓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외부인과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와 관습을 유지했다.

특히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오늘날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같은 종교시설이 치외법권 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성균관과 수복들이 사는 반촌 일대는 공권력이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이처럼 반인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조선판 스타강사도 정학수도 이런 환경에서 글을 깨우치고 양반과 교류했을 것이다.

<조선의 엔터테이너>(이데아.2015)가 전하는 이야기다. 요즘 수억 원대 수입을 올리는 스타강사처럼 정학수의 명성도 대단했다. 하지만 정학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쉼 없이 회자됐다. 단순히 잘 가르친 것만이 아니라 출신성분을 잊을 만큼 고매한 인격과 학풍 때문이었다. 책에 따르면 조선 후기 시인 조수삼도 <추재기이>에 그의 인격과 학풍을 칭찬하는 글을 남기고 그를 정 선생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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