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이런일이] 이방원 향한 이성계의 분노, 두 번의 살해 시도까지!
[책속에 이런일이] 이방원 향한 이성계의 분노, 두 번의 살해 시도까지!
  • 윤혜란 시민기자
  • 승인 2016.03.23 12: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2인자들> 조민기 | 책비

[화이트 페이퍼]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이방원이 조선 3대 왕인 태종에 오르면서 끝이 났다. 스승인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의 피까지 흘리며 오른 자리였다.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된 아들 이방원을 어떻게 보았을까? <조선의 2인자들>(책비. 2016)에서는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을 두 번이나 직접 죽이려 한 후에야 비로소 아들이 왕이 된 것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형제들을 죽인 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태조는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선덕왕후 강씨의 친척을 내세워 태종과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성계는 반란 세력의 수장이었지만, 태종은 아버지를 처벌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사자성어 ‘함흥차사’의 유래가 나온다. 태종 이방원은 여러 차례 신하를 보내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하지만 백발백중 명궁이었던 태조는 사신이 올 때마다 화살을 쏘았다. 이에 사신은 태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임을 당했다. 이에 심부름을 간 사람이 한 번 떠난 뒤로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 소식이 없음을 비유하여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어쨌든 태조 이성계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에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태조의 진노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임을 안 이방원의 책사 하륜은 태종 이방원에게 조언을 했다. 왕복인 곤룡표 안에 갑옷을 입을 것과 태조를 맞이하기 위해 임시로 세운 전막의 기둥을 아주 굵은 나무로 세우라는 것.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태종의 얼굴을 본 태조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활을 당겼다. 하지만 태종은 순간적으로 굵은 기둥 뒤로 몸을 피해 간신히 화살을 피했다.

같은 날 저녁,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이때 하륜은 태종에게 다시 한 번 만약을 대비하여 내시에게 곤룡표를 입히라고 또 조언했다. 이에 태종은 하륜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곤룡표를 입은 내시가 태조에게 술잔을 올렸다. 역시나 곤룡표만 보고 내시를 태종이라 여긴 태조는 품에 있던 철퇴를 꺼내 내리쳤다. 내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내시가 죽은 뒤에야 태조는 그가 태종이 아님을 확인했고, 마침내 태종 살해 계획을 포기했다. 이에 태조는 한탄하며 그 날에서 비로소 태종이 임금이 된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말 부자지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살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책에 등장하는 함흥차사의 유래와 두 번의 살해시도 내용이 역사 실록의 기록이 아닌 야사(野史)라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관계는 쉽게 회복하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랐던 아들과 친족과 아끼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아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

권력 앞에 깨어진 부자지간의 모습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하다고 해야 할까. 부모가 자식이 살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삼강오륜의 하나인 부자유친(父子有親), 즉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말이 그저 무색하기만 하다. 국가를 유지하고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있음은 국가 기강조차 무너진 현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위기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