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를 외국노동자로 그린 작가 `습지생태보고`
둘리를 외국노동자로 그린 작가 `습지생태보고`
  • 북데일리
  • 승인 2005.10.2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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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은 둘리를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동심의 원형처럼 자리잡았던 아기공룡 둘리가 나이를 먹고, 한국사회에 ‘어른’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유명한 오마주 단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길찾기, 2004)를 기억하는 이라면 최규석(28)이라는 만화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둘리는 손가락이 잘려 초능력을 상실하고, 인간이 아니어서 주민등록증을 갖지도 못하는 노동자가 된 충격적인 상상은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둘리는 그 수많은 장애물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대한민국에서 영광을 누렸던 어린 시절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다. 그러나 힘들게 사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상징인 중년 둘리뿐만이 아니다. 허영심으로 집을 나가 동물원에서 사는 또치, 한탕주의에 빠져서 돈 날려먹고 비틀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도우너, 매일같이 밤무대에 서지만 만년 3류가수 신세인 마이콜 등 암울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무섭도록 잘 그려져 있다.

그의 이런 붓터치가 더 나아갔을까. 그를 한국 만화계의 촉망받는 유망주로 단숨에 뛰어오르게 했던 ‘공룡 둘리...’에 이어(그는 이 작품으로 2004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과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새 작품 <습지생태보고서>(거북이북스. 2005)가 나왔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공룡 둘리의 모습이 오버랩되지만 좀 달라졌다. 그는 강렬한 오마주의 세계에서 한발 물러나 더 깊은 자기세계를 향해 나아간 듯하다. 캠퍼스 앞의 반지하 자취방에 모여 사는 청춘 군상의 자존심과 욕망, 유치와 비열함이 교차하는 적나라한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어서 더 실감난다.

그 안에는 젊음이 맞부딪치는 좌절과 기나긴 한숨, 그리고 몸부림치는 역동적인 활력이 스며있다. 뿔을 팔거나 피를 팔면서 기생충처럼 자취방에 빈대 붙어 사는 사슴으로 상징되는 동물의 등장은 둘리의 흔적 같기는 하다. 사실은 그가 다닌 상명대의 상징물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이 자취방의 5인방은 예술혼으로 무장한 지방대학 미대생들. 그들은 비가 새는 방에 옹기종기 모여 소주도 마시고 라면도 끓여먹지만 각기 다른 모습의 자신을 지켜간다.

그들의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가난과 무기력, 주변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낮은 곳의 사람들의 일그러진 세세한 표정도 쉽게 떨궈낼 수 없다. 젊지만 이미 늙어버린 세대들처럼 그들은 때로 현실을 관조한다. 때로 뻔뻔하게 세상을 조롱하고 침을 뱉는다. 어떨 때는 어찌할 수 없는 낭패감으로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언제나 그늘진 곳에 있는 약자에 대한 애처로운 시선이 머문다.

그는 때론 톡톡 튀는 감각으로 때론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사물을 그려내서 열광적인 지지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가령 휴대폰 충전녀와 휴대폰남의 불륜을 그린 책의 마수걸이 작 ‘비애’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대사는 이렇다. “둘이 뭐했냐, 충전도 했냐” “이런 편의점 충전기 같은 ×야”라는 대사를 들으면 역시 강렬한 감각의 재능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통통 튀는 발랄함과 싱싱한 활력과는 거리가 멀다. 1년에 두 번 등록금 낼 때마다 돈을 갖고 호령해보는 황제놀이를 하는 룸메이트들. 힘든 생활고로 크리스마스에 노동현장을 헤매고, 부자 친구를 만나면 잘 사는 척 허위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어 유일한 길은 자수성가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은 탄탄태로가 아니라는 것을.

재미있어서 더 슬픈 이 만화는 욕망이 펄펄 끓어 넘치는 사회에서 욕망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는 청춘들의 가슴 아린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2004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된 바 있다. 습지는 하등동물이 기생하는 습기 많은 밑바닥을 의미하며 또 반지하 자취방의 남루함을 뜻하는 메타포였지만 이 만화의 연재료로 그는 습지를 탈출했다. 한국만화 차세대 에이스를 발견한 반지하 습지에서 말이다.

[북데일리 박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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