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밤하늘`에 별이 된 사람들
`역사의 밤하늘`에 별이 된 사람들
  • 북데일리
  • 승인 2008.01.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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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김원일의 <전갈>(실천문학사. 2007)을 읽고 있는 때에 <수난 2대>의 작가 하근찬이 이승을 등지고 영면의 길을 떠났다. 전쟁이 불러온 참상을 한 부자의 비극적 삶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하근찬의 인물들이 일제 식민치하로부터 태어나 분단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 일제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3대에 걸친 전갈의 주인공들과 한배에서 태어난 역사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밀양문화원의 손정태 이사가 조선의용대의 창설지가 중국 후베이성의 우한시 일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여 밝힌 것도 하근찬 작가의 별세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소설 <전갈>의 공간적 배경이 밀양이라는 것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자 조선의용대의 창설자인 약산 김원봉의 출신지가 밀양이라는 것, 소설의 주인공인 강재필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상받기 위해 그 행적을 찾아가는 독립군 출신 할아버지의 삶과 비밀이 묻힌 곳 역시 밀양이라는 점에서 그 우연성에 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역사의 필연 같기만 한 사건들도 당시에는 하찮은 우연에 의해 한 개인의 삶과 운명을 희롱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일제 징용에서 한쪽 팔을 잃은 <수난 2대>의 주인공 박만도나 6.25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 진수에게서 우리는 민족 수난의 처절한 역사를 보기도 하지만,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어쩌지 못하고 희롱 당한 개인의 참담한 운명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들 부자가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그 불행을 가져다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역사의 우연성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문제의 소설이 우의적인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 것도 이런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우연성에 희롱 당한 3대의 이야기

소설 <전갈>은 일제 식민치하에서부터 분단과 이념의 골육상쟁의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역사의 무대에서 성(性) 없이 태어나 이름 없이 죽어간, 혹은 죽어갈 한 가문의 3대에 걸친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다.

할아버지 강치무의 `조부 대에 이르러 상남면에서 노북으로 이사 온 후 소작붙이로 전락`하였고 `작인 살림이 그렇듯, 강치무는 서당 글조차 읽지 못한 채 성장했`으니 주인공 강재필의 가계란 할아버지 때부터 초라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들의 가계가 초라한 점을 굳이 밝혀야 하는 것은, 소설 <전갈>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진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생존을 살아내야 했던 우리네 개인들의 서글픈 기록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강재필은 그 출생부터가 너무나 비극적이다.

아비인 강천동은 공장을 다니다 기계에 손이 잘린 불구에다 성질까지 포악한 망나니에 홀아비였고, 어미는 그 아비에게 강간을 당해 죽기보다 더 싫은 그에게 시집을 온 처자였다. 그 강간의 씨가 자신이었고 위로 있는 누나는 어미가 다른 이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이념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아비 강천동의 운명은 할아버지 강치무의 빨치산 경력과 산중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그 출생부터가 험난한 것이었고, 그것은 아비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역사는 한 개인에게 우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모진 고문과 형극의 세월을 견디도록 강요하는 괴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강천동은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고 무엇 하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에 버거운 운명을 짐 져야했다. 노무자로 직공으로, 불구가 된 후로는 폐기물 불법투기꾼에 개 도둑질 개 도살을 일삼는 개장수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어미는 자신의 강간범이기도 한 아비와 평생을 화해하지 못했고, 그 아비의 포악을 피해 시댁인 밀양에 살게 된 것이 강재필이 어린 시절을 밀양에서 보내게 된 사정이다. 아비는 울산에서 작부출신의 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어미는 남편 없는 시댁에서 남편 없기는 마찬가지인 시어미를 모시고 살다가 마흔도 안 된 이른 나이에 거식증을 앓다가 죽고 만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재필이 올곧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일 것이다. 우리의 기대대로 그는 말썽꾼에 싸움꾼으로 성장하고 좁은 밀양을 떠나 서울의 폭력배로 법무부의 교정 학습을 거친다.

아비 강천동의 비천한 삶이나 말년의 실성기 짙은 불행은, 또한 강재필의 소년원 출입부터 폭력배로의 성장은, 그러나 사실 그들의 죄과라기보다는 독립군이었으나 관동군 731부대의 부역자로 살아야 했고 광복 후에는 은둔의 세월을 거쳐 다시 빨치산의 운명을 살아야 했던 할아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질곡의 우리 현대사가 한 개인에게 운명지운 역사의 참혹함이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으나 강치무는 피식민 지배의 조국의 현실을 깨치고자 했었다. 다만 그가 속한 독립군 부대가 자유시참변으로 말해지는 배반의 수렁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관동군부대의 포로로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할아비부터 그 손자에 이르는 그들 3대의 삶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루타의 비밀을 영원히 간직 한 채, 할아비가 은둔자로써의 삶을 선택하여 빨치산 투쟁에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아비 강천동의 삶은 그렇게까지 불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역사에 있어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적 필연과 그에 다른 역사적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 이름 없는 개인에게 역사는 감당하지 못할 시대의 무거운 멍에를 얹고 멍에로부터 도저히 풀려날 길 없는 현실의 고통을 강요한다.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역사에 고삐를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에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피멍이 든 몸으로 신음하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그저 우연한 운명의 개인으로 말이다.

별자리로 남은 오리온 신화-전갈이 의미하는 것

"전갈자리 신화예요. 신탁을 받은 오리온이 시력을 회복해선 복수하러 나섰다가 여신 아르테미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죠. 아르테미스의 오빠가 아폴론인데, 누이가 미남 오리온을 사랑하게 될까 봐 전갈을 보내 누이를 지키게 했는데, 오리온이 전갈 독침에 죽었죠."(책 341쪽)

소설을 읽으며 필자는 왜 소설의 제목이 `전갈일까?`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소설에서 전갈이 언급되는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딱 한 곳뿐이다. 대체 작가는 무슨 의미로 전갈을 소설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일까. 오리온 신화의 내용과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기에 작중 안나의 입을 통해 그 신화를 말하게 했을까.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거인 사냥꾼인 오리온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에우리알레의 아들이라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 시데가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미를 다투는 불경을 저지르다 명계(冥界)로 쫓겨난다. 아내를 잃은 오리온은 키오스섬의 왕 오이노피온을 찾아 가서 딸 메로페에게 구혼을 하고, 그녀를 얻기 위해 섬 안의 야수를 퇴치하였으나, 왕은 약속대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술에 취해 자고 있는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신탁에 의해 시력을 회복한 오리온을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사랑하게 되어 델로스로 데려갔다는 일설도 전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이다. 오리온은 전갈을 피해 바다로 도망갔으나 오빠 아폴론의 계략에 의해 아르테미스가 쏜 화살에 죽었다는 설도 있고, 그가 원반던지기에서 감히 여신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아르테미스의 시녀인 오피스를 겁탈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전한다.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는 오리온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겁탈하려 했기 때문에 여신이 전갈을 보내 뒤꿈치를 물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갈은 하늘에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으며 오리온도 마찬가지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오리온좌는 영원히 전갈좌를 피해 다니는 것이다.

소설 속의 강재필은 오리온의 운명을 닮았다. 배신을 당해 눈이 먼 것처럼 범죄일당의 욕심과 배신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게 되고, 사주한 나회장을 지켜줌으로 해서 다시 부름을 받는다. 재필이 독립군이었던 할아버지의 일생에 천착하는 것은 그 자신 비루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한줄기 빛을 찾고픈 강렬한 욕망 탓이다.

눈이 먼 오리온이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한 아이를 붙잡아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 눈을 뜨는 것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암흑 같은 자신의 삶에서 할아버지의 독립군 전력은 동방의 빛 같은 찬연한 구원의 무엇이다.

"전갈을 조심해요. 내가 준 목걸이가 부적인 셈인데……."

"물린 독사의 독이 최고 치료제라잖아요."

"그래? 나는 오리온이 아니라 전갈이다."(책 341쪽)

작가가 오리온 신화를 소설 속에 차용하는 궁극의 저의는 사실 오리온 신화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전갈의 독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소설의 결말을 암시하기 위한 복선이다. 역사의 우연성이거나, 비극의 시대에 던져진 개인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거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개인이거나 소설 속의 3대는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해간다. 시대로부터 사회로부터 또한 자신의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비극적 주인공들은 어쩌면 사회의 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천동이나 재필 같은 독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위험한 독인 것들이 버젓이 행세하며 살 수 있도록 기능한다. 화이트하우스의 나회장 같은 이나 기쁨자리의 조회장 같은 이나 세상의 독버섯 같은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재필 같은 조무래기들은 사회의 독이라 말하기에도 하찮은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지위와 소유만으로 독과 독 아닌 것을 판단한다. 천동의 포악은 가정에 국한된 것일 뿐이며 재필의 폭력은 사주하는 이가 없으면 금시 힘을 잃는 개인의 물리력일 뿐이다. 그것을 세상의 폭력으로 조직하는 것은 언제나 폭력의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역사, 폭력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든 이들은 언제나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며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 이름을 미화한다. 폭력의 원흉은 아르테미스란 아름다운 여신으로 남고 그 명에 따라 독침을 쏜 전갈은 그 흉폭성과 치명성만이 인구에 회자된다. 재필의 복수는 그래서 통쾌하다. 화이트하우스고 기쁨자리고 세상의 독에 독침을 쏘며 비행기에 오른 재필의 복수는 또한 당당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있음을 자각했다. 나는 주사기에 반쯤 남은 그라옥손을 목구멍에 대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쏘았다."

비록 비행기 안에서의 한 바탕 꿈으로 묘사되었지만, 이것이 재필의 진정한 복수요 아름다운 승리다. 그는 그라옥손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제 목구멍에 찔러 넣음으로써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진저리쳐지는 지독한 운명의 사슬과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비루했던 과거의 재필은 없다. 그는 이제 할아버지의 독립군 전력과 마루타에 얽힌 비밀도, 빨치산의 이력도 아무 상관이 없다. 아비와 어미의 기구한 운명도, 심지어는 자신의 혈육인 자식의 내일마저 무시한 채,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와 결별한다.

그래서 그는 비록 환한 낮에는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이면 뚜렷하고 밝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고백처럼 <전갈>을 통해 `그 시대의 중심부에 서 있었으나 열외자의 길로 들어선 끝에 잊힌 존재로 생을 마감한` 이 땅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고단한 생애를 손자의 이름으로 별자리로 만들어 하늘에 걸었다. `유년기에 겪은 악몽으로` 여전히 밝은 대낮에는 볼 수 없지만, 아직도 오리온과 전갈은 멀리 떨어져 걸려 있지만, 노작가의 수고 덕분에 필자와 같은 이들은 그 별을 보고 길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임흥재 시민기자 epogue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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