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위즈덤하우스. 2007)의 저자 노대환은 “친구 이희천의 죽음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희천은 연암의 젊은 시절 스승인 이윤영의 맏아들로, 박지원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1771년 사형을 당하는데,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명기집략>이라는 불온서적을 소유했던 것.
<명기집략>은 중국의 역대 사실을 기록한 <강감회찬> 중 명나라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여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잘못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선조가 술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했고, 인조가 임금 자리를 찬탈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모두 용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이는 박필순의 상소로 알려졌는데, 이를 듣고 격분한 영조는 청에 우의정 김상철을 파견해 <강감회찬>의 소각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책을 가진 사람은 자수하기를 명령했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 좌의정 한익모, 우의정 김상철을 비롯한 70 여 명이 이 책을 내놨다. 이들이 바친 책은 한성부 창고에 가득 쌓였다.
그러나 아직도 모자라다고 판단한 영조는 책 중개상인인 책주릅들을 체포해 책을 판 곳을 실토케 했다. 이 과정에서 이희천이 잡혀 왔다.
그는 책을 사놓기는 했지만 실제 보지는 않았으며 상소가 나온 후 즉시 불태웠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영조는 이를 믿지 않았고 이희천은 결국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친구의 처참한 죽음에 연암은 큰 충격에 빠졌다. 상소를 올린 박필순은 연암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이였고, 박필순이 처음 본 <강감회찬>도 연암의 팔촌 형인 박명원의 집에서 나온 것이기에 자책감은 더욱 컸다.
이 일이 있은 후 연암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고, 과거 역시 포기했다. 몇 년간은 폐인처럼 지내기도 했다. “아내를 먼저 보낸 슬픔 보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심하다”고 할 정도로 교분을 중시했던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제자 이한주가 세상을 떠나자 쓴 <이몽직애사>에도 이는 분명히 나타난다. 다음은 그 일부다.
“나는 내 친구 이사춘이 죽은 뒤부터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축하하는 일이건 조문이건 모두 폐해버렸다. -중략- 교제가 끊어지는 것도 달갑게 여겨, 비록 실성하거나 멍청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처럼 친구에 대한 연암의 깊은 마음 씀씀이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우정파괴도 서슴지 않는 요즘, 한 번쯤 되새겨 볼 이야기다.
[김대욱 기자 purmae33@p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