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 입은 위화` 다시 읽는 기쁨
`새 옷 입은 위화` 다시 읽는 기쁨
  • 북데일리
  • 승인 2007.11.1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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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상념에 젖을 시간도 없이 시간에 등 떠밀려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문 밖에 보이는 은행 나뭇잎들은 바람결을 따라 흩날리고, 미화원 아저씨들의 빗자루질보다 낙엽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지 낙엽들이 이내 양감이 느껴질 정도로 수북해졌습니다. ‘만추(晩秋)’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책을 읽기에도, 그저 거닐기에도 흡족한 가을입니다.

이맘때쯤 되면, 작정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의 속도를 실감하면서, 한 해를 다시 한 번 굽어보게 됩니다. 나이든 만큼 보인다고 생전 안 보일 것 같은 것들도 몇 개씩 보이고, 꽉 쥐고만 있던 손을 펴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온 생이 그리 길지도 또 그리 짧지도 않지만, 저는 이렇게 한평생을 버무리며 사나 싶습니다. 식성을 따라가는 건지 때론 조금 싱겁기도 하고, 또 매우 맵기도 하네요.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푸른숲. 1993)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어 <인생>(푸른숲. 2007)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 알고 계세요? 저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에 달려가서 냉큼 샀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인생’보다 마음에 더 들긴 하지만, 어쨌든 번역 투의 문장들을 고치고 인물들의 이름도 중국어 표기법에 맞추어 수정된, 매끄러워진 위화의 소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큰 즐거움입니다.

<인생>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푸구이라는 한 노인의 살아온 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복하게 살다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도련님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몰락해가면서 가진 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가졌을 때 느낄 수 없었던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읽으셔도 좋지만, 중국사를 좀 알고 읽으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인생>은 작가의 말처럼 개인과 운명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힘이 센 친구와 약한 친구가 같이 다니는 격인가요? 푸구이 노인의 일생을 통해 우리는 사는 것과 죽는 것도 다 운명이며, 이 자리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바로 삶의 이유, 즉,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위화는 중국 민초들의 고된 삶을 그대로 우리들의 삶에 전사시켜 실감나게 보여 줍니다.

혹자는 <인생>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삶은 행복한 것이라고 느끼게끔 만드는 소설이 아니냐며 음모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으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요? 삶은 결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고결한 것입니다. 누추하고 비루한 삶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지요. 원론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가난하고 힘들지라도 그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제대로 조명했다는 것 자체가 위화의 소설이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나는 소설을 축구에 비유하고 싶다. 아무리 선수의 동작이 이름다워도 골을 넣지 못하면 무효다. 반대로 동작이 우스꽝스러워도 골이 들어가면 성공인 것이다. (위화와 공지영의 대담 중에서)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창작의 고통을 알기에 ‘동작도 아름답고 골도 넣으면 되지!’라는 식의 생각은 이전에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동작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지라, 어떤 작품이 훌륭한 작품인가를 늘 고민하는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한 마디였습니다.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10p)

진정으로 울리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 벼르기만 하고 책장에 고이 꽂아둔 <형제1,2,3>(휴머니스트. 2007) 역시 기대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푸구이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늦가을에 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기수(傳奇叟)가 읽어주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위화의 <인생>, 읽고 마음껏 우셔도 좋고, 베고 주무셔도 좋고, 눈물 떨어진 책을 선물하셔도 좋고, 다 좋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의 인생과 <인생>이 만나 또 다른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That`s the way life goes.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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