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 작가들은 투명했다. 내밀한 연애, 아픈 가족사를 숨김없이 고백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플라타나스 같은 가을날의 연정, `슬픈` 어머니에 대한 기억...
29일 저녁 7시 경희궁의 아침 교보문고빌딩 문화이벤트 홀에서‘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이 주최한 낭독회가 열렸다. 참여한 작가는 모두 넷. 소설가 서영은, 윤후명, 민환 시인 이재무였다. 사회자는 김다은교수(추계예술대). 주제는 `내 인생의 잊지못할 편지`였다.
서영은은 작고한 김동리 선생이 남긴 편지를 들고 나왔다. 그는 “20년 동안 연애 했고, 4년간 같이 살았고, 5년간의 투병을 함께 했다”며 “이 편지는 30년 세월 중 유일하게 받은 편지”라고 말문을 열었다.
애틋했다. 연애 시절. 서영은은 눈 속에 묻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김동리 선생이 직접 쓴 편지를 대문 앞 눈 아래 묻어 놨던 것. 드라마틱한 전달 과정 못지않게 내용 또한 흥미진진했다.
나이 차 때문이었을까. 편지 속 김동리 선생은 늘 조바심에 안절부절 못했다. 어린 연인 서영은이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음을 오해,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오늘도 영을 생각했다. 그리움에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이에 서영은은 “당시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 관계상 작가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선생님께서 질투를 하셨던 것 같다”며 “하지만 나는 이조 시대 여자였다.”고 농담을 던졌다.
특히 당시 편지와 함께 받은, 30년이 넘어 빛바랜 플라타나스 잎을 수줍게 내보여 탄성을 자아냈다.
편지 낭독은 계속 됐다. 소설가 윤후명이 옛 남자들이 아내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쓴‘빈방에는 달빛만 싸늘하고’를 소개했고, 시인 이재무는 가슴에 화인을 남겼다는,‘연보라 빛 등꽃 같은 당신에게’쓴 연서를 펼쳐보였다.
계속해서 소설가 민환의 ‘당신의 뒤를 좇는 젊음’이 뒤를 이었다. 헤어진 생모에 대한 절절한 마음과 유년의 기억을 꺼내 놓은 내용이었다. 듣는 이의 가슴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애잔해졌다.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다은 교수는“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작가의 기질이 아닌가 싶다”며 선후배들의 고백에 갈채와 위로를 보냈다.
독자 참여도 이어졌다. 14개월 된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김용수씨)는 큰 웃음을 자아냈고,‘뒤 늦게 붙인 편지’(김영욱 씨)는 귀를 쫑긋하게 했다. 이다영, 서초화 씨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 이루다, 신용철 씨의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져 감흥은 가을밤처럼 고즈넉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