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판 폭풍의 언덕?
멕시코 판 폭풍의 언덕?
  • 북데일리
  • 승인 2007.10.2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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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학생들은 책을 사는 데 인색합니다. 군것질하기도 빠듯하니까요. 가끔 학부모 중에도 책사는 돈을 아까워하시는 분이 계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양서를 읽는 것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하고, 가족 모두 도서관 나들이를 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는 일은 아시다시피 쉬운 일이 아니죠.

자기 돈으로 절대 책은 안 산다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권씩 사 모으는 소소한 재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고 마흔 권 가량 모아놓은 민음 세계문학 전집을 예로 들었는데, 그 학생 대뜸 왈.

“아, 그거요? 집에 다 있어요. 얼마 전에 엄마가 읽어보라면서 한꺼번에 주문 하셨더라구요.”

학생의 풍요로움이 저를 허탈하게도 부럽게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 아직 너무 어려워 못 읽겠다네요. 그냥 꽂혀있는 것보다는 읽어주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학생에게는 전집 중 쉬운 책부터 권해주면서, 저도 좀 빌려 읽기로 합의를 봤었습니다.

그 때, 처음 빌려 읽었던 소설이 <빼드로 빠라모>(민음사. 2003)였습니다. 멕시코 문학의 일인자로 불리는 후안 룰포의 작품입니다. 단 두 작품으로 멕시코의 ‘국민 작가’가 된 후안 룰포는 남미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확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이른바, 붐(Boom)세대 작가입니다.

<빼드로 빠라모>에는 멕시코 혁명 이후 나타난 문제점들을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농지개혁이 일어났음에도 대농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남은 것이 없는 농민들은 급기야 땅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소외되고 고립된 농촌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일제 수탈 당시의 상황과 아주 흡사하죠?

이야기는 후안 프레시아도라는 사내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인 빼드로 빠라모가 있는 꼬말라를 여행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꼬말라’가 바로 황폐한 농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프레시아도는 이 곳에서 이 곳의 부호인 아버지 빼드로 빠라모와 관계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생각해보면, ‘기억’은 참 무섭습니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과거에 얽매이게 하고, 때로는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한 평생 끌려다니게 되기도 하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는 것이 죽는 것이며,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꼬말라’의 사람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살아있으되 죽은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명이 다해 죽고 나서도 그들은 다시 삽니다. 죽어서도 ‘기억’에 묶여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빼드로 빠라모의 잘못입니다.

빼드로 빠라모는 죽은 지 오래지만, 그는 작품 안에서 계속해서 현재성을 가집니다. 그가 죽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꼬말라’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기억에서 빼드로 빠라모를 살려 둡니다. 그렇게 그들은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빼드로 빠라모>는 혁신적인 작품입니다. 화자는 갑자기 바뀌지요, 시간은 뒤죽박죽 섞여 정신이 없지요, 상황은 어슴푸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애매하지요, 게다가 현실과 환상의 혼재까지. 읽다보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다 읽고 난 후에야 의미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구조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니, 반드시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자는 농담삼아 한 평론가가 룰포의 원고를 보고 돌려주다가 원고를 떨어트려 바닥에 흩어진 원고를 정신없이 챙겼는데, 쪽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아, 70여개의 에피소드들의 선후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어 그냥 출판하고 말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대충 그 정도입니다.

후안 룰포는 이 작품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300여 페이지 정도를 집필했고, 그 후, 자신의 개입이 들어간 부분을 반 정도 과감하게 삭제했다고 합니다. 아까워라. 의미나 사건의 모호함, 열린 해석 등이 아마도 이 과정에서 많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멕시코 지역에서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한 작가가 지역 색이 강하게 풍기는 작품을 써냈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공감대 형성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보편적 주제인 권력이나 사랑, 죽음 등이 가지는 의미가 고스란히 와 닿아서 그렇겠지요. 여러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소설이었습니다.

‘멕시코가 무대가 되고 카프카가 썼을 만한 폭풍의 언덕’이 이 <빼드로 빠라모>라고 합니다. 웃음도 나왔지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끝까지 읽으실 수 있는 분들에 한해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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