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약자입장에서 세상 보라!
논술, 약자입장에서 세상 보라!
  • 북데일리
  • 승인 2007.10.1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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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첨삭을 할 때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애로사항은 “그 문제에 관하여 도대체 쓸 게 없다”는 푸념이다. 논술은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고 하지만 학생들에게 논술은 배경지식이다. 그 문제에 관해서 아는 게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따진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그렇다. 논제분석능력과 제시문 독해 능력, 서론-본론-결론의 구성 능력은 강의로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지만 배경지식 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논술 역시 수능이나 내신처럼 주입식 교육이 되기 때문이다.

붕어빵 논술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학생들이 논술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외워 쓰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 생각이 비슷하고 배경지식의 출처가 교과서와 참고서 정도로 통일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독서가 중요한 것이다. 독서에 투자하면 논술 시험에 나오는 주제에 관해 다양한 배경지식의 스키마를 쌓을 수 있다. 사고력은 어떨까? 배경지식과 사고력은 바늘 가늘 데 실처럼 짝패로 움직이게 돼 있다.

실제 학생 글 중에서 배경지식이 풍부한데 사고가 빈약한 글은 드물다.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배경지식을 체계적으로 늘리는 것이 논술에서 필요한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비결이 되는 셈이다.

사고력, 그중에서 비판적 사고가 가장 중요하단다. 비판적 사고는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필요조건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범위를 좁혀달라고? 좋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보자.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외된 약자에 관심을 갖자는 거다. 논술 공부할 때만큼은 그들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가져보자. 이게 바로 비판적 사고의 충분조건이다.

비판적 사고와 논술의 관계가 이렇다면 학생들은 두말할 것 없이 신문을 봐야 한다. 신문을 봐야 비주류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에선 그들의 주장도 들을 수 있다. 어느 신문이든 일정 정도는 비주류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이치. 영상매체 중에는 없을까? 영화가 있지만 수업 시간에 영화 한 편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필자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EBS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 ‘지식채널ⓔ’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 재미도 있고 알차다. 사람, 사회, 문화, 과학 등으로 범주를 넓혀가며 당대의 예민한 시사쟁점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뮤직비디오 한 편의 길이인 5분 정도 분량이지만 지식의 양과 깊이가 한 편의 영화와 맞먹는 느낌이다.

중고생들은 TV 볼 시간이 없다. 그러면 책이라도 읽자. <지식ⓔ>(북하우스. 2006)란 타이틀로 출간된 이 책에는 모두 40편의 에피소드를 모았다. 350쪽 분량이지만 사진이 많아 넉넉잡고 두 시간만 투자하면 완독할 수 있다.

비판적 지식인을 가리켜 “뜨거운 가슴에 차가운 머리의 소지자”라고 했던가? 이 말은 논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사회에 돈 되는 정보는 넘치지만 여백, 성찰,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 등으로 번역되는 비판적 지식은 사실 논술 공부할 때 아니라면 쳐다 볼 시간도 없다. 뜨거운 가슴은 약자에 대한 관심과 행동을 촉구한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학생들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망’에 눈을 뜨면서 자연스럽게 비판적 지식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 인도의 불교 신화를 보면 인드라 망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수많은 구슬로 엮인 그물의 어느 한쪽을 잡아당기면 그물의 다른 쪽 구슬에 영향을 주어 전체 그물의 모양새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은 연결돼 있다. 그 연결 고리 속에 논술이 숨어 있다. 그 연결 고리의 조합 중에서 내가 누리는 행복과 어디선가 누군가가 흘리는 눈물에 주목해 보자.

책을 살펴보자 . 우리는 스타벅스 커피를 이제 일상에서 즐기지만 그 커피를 생산해 내는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 농가의 1년 수입이 얼마 정도인지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1년에 6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축구공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그 축구공을 만드는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자들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일당 300원이란다. 하루에 60통씩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이 편한 세상’이 도래했다. 휴대폰의 원료는 콜탄이다. 콜탄의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콜탄을 둘러싼 반군과 콩고 정부군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300만 명의 아프리카 원주민이 희생됐단다. 제3세계 노동력의 착취와 희생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가 편해진 것이다.

학생들이 이 사실을 알면 그것이 글로써 드러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손으로는 비판적 사고를 드러내면서 속으로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내 잘못이 아니지 않냐?”고 생각할 것이다.

대한민국 논술의 한계가 여기까지다. 일단 알기만 하면 된다. 논술은 어디서 주어들은 걸 자기 생각처럼 기술적으로 쓰는 시험이지, 쓴 걸 실천에 옮기고 검증을 받는 시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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