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작가 이현 `일그러진 권위에 저항하다`
[문학비평] 작가 이현 `일그러진 권위에 저항하다`
  • 북데일리
  • 승인 2007.10.1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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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가면을 벗어 던지는 용기를 보여준 아이들

[북데일리]작가 이현이 청소년 소설을 냈다. <우리들의 스캔들>(창비. 2007)이란 제목이다. ‘스캔들’하면 내게는 배용준이 나온 한국 영화가 떠오른다. 또한, ‘남녀상열지사’와 얽힌 소소하나 연속된 이벤트 혹은 워터게이트 사건 등과 같은 정치적이고 군사적 의미를 갖는 거대한 단어가 연상된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의 내용은 연보라네 반(중학교 2학년/남녀합반)에서 벌어지는 약 한 달간의 익명의/익명에 대항한, 혹은 권위의/권위에 대항한, 다수자의/다수자에 대항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이제는 카페를 만든 당찬 여자애는 학교에(카페에) 없지만, 누군가 인계받았을 것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속속 반 아이들이 카페 회원으로 가입하고, 보이지 않는 그래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제 3의 존재가 ‘목소리의 흔적’으로 이 카페에 잔존하고 있다.

그런 카페를 드나드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선생들을 공격하며 마음에 쌓인 감정을 해소하는 게임이 인기를 얻고 아이들은 각자가 정한 익명의 가면을 쓰고 참여한다.

그러나 빠듯하게 돌아가는 학교 생활, 그 뒤로 이어지는 학원 생활에 치인 아이들에게 ‘카페’는 외재하는 또 하나의 가상공간일 뿐 이모의 등장 이전에는 하나의 의미로 그네들의 일상 속에 들어올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

이모, 자칭 비혼모, 당당한 외모에 대찬 성격, 자율적으로 살아온 인물이 학교라는 조직체 속에 들어옴으로서 엄격한 조직의 규칙과 상하, 좌우로 구별되어진 구성체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주인공 연보라와 이모의 관계를 알고 있는 예닮이 그리고 은하. 그것이 두려운 보라. 그들 사이에도 그간 보이지 않았던 틈새가 드러나고, L이라는 익명의 존재가 게시한 이모의 사진은 학급/카페 구성원 모두의 지반을 흔드는 마그마로 작용한다.

어른에 대한 약자로서의 청소년, 학교에 대한 약자로서의 학생, 이사회라는 조직에 대한 약자로서의 교사,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약자로서의 실명, 이들 사이에 불안전하게 쌓여진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혼모이자 클럽 가수이자 알콜과 담배에 자유로운 여자 교생의 존재는 지하에서 이제 막 지상 세계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기존의 지상 세계가 온전히 지하 출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모로서는 혹독한 신고식이 본이 아니게 되고야 만 스캔들. 사실 스캔들이란 용어 자체는 차별성이 내재한다. 균질의 것이 아님을 포함하고 있다.

일련의 사건이 그 자체로 지속될 때 타자의 시선이 던져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스캔들로는 불릴 수 없다. 하나의 이벤트인 이모의 등장이 스캔들이 되도록 규정지어준 것은 익명의 L이다.

첫 부분에 주인공 연보라는 익명의 존재 L과 보이지 않으나 감시하고 있는 듯 느껴지는 정윤선의 시선과 갈등을 일으킨다. 보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갈등이다. 그러나, L이 이모란 존재를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지목한 이후, 연보라가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는 권위, 조직, 익명성으로 확장되고 연장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카페를 접속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유행가 가사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는 들려’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허사이다. 아니 점점 공포의 문지기처럼 카페의 문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사건을 풀 열쇠 또한 카페 내부에 존재한다. 외부(교실)와 내부(카페) 사이에 존재하는, 달리 표현하자면 실체(현실)와 허상(가상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가 두려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푸코가 말한 ‘원형탑의 감시자’처럼 하여간 존재하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시련을 가할지, 처벌의 대상으로 나락에 빠뜨릴 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고 무섭다.

그러나 이 괴리감 뿐 아니라 학교란 조직 자체도 아이들이 처한 약자의 눈의 위치에서 보면 너무 거대해서 전부 볼 수 없는 거대한 괴물, 즉 원형탑과 같다. 아이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비교적 합리적이고 세련되고 친절했던 담임선생 역시 그 조직의 피라미드에서는 아래쪽에 위치한 약자이다. 아이들은 고개를 쳐들어도 피라미드 상부 혹은 그 내부에 숨어있는 힘을 마주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이에 맞선다.

지반을 흔든 마그마가 일단 지상으로 분출된 이상, 흐르던 마그마는 흐르게 마련이다. 이모가 그렇다. 흘러야 한다. 멈출 수 없다. 일단 커다란 장애물이 고랑을 틀어막고 멈춰서라 지시해도 소용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뜨겁고 그러기에 유동적이다.

이모는 막서기로 한다. 소수자로서 또 다른 소수자(아이들)과 잠시 갈등하는 구조에서 약한 갈등을 드러내는 대목이 있기는 했으나, 이모는 소수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마그마가 흘러든 연약 지반의 아이들은 자신들 역시 약자로서 철저히 연약 지반 위에 놓이는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음에 분노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건이 생긴다. 프로도로 가장한 누군가가 카페의 공개를 주장하고, 또 누군가가 조직의 하수인인 담임으로부터 폭력적으로 구타당하는 반 아이 인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온라인 카페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 누군가가 주장한다. 카페를 공개하자고. 그리고 또 누군가가 주장한다. 폭력을 폭로하자고.

폭로란 의도적/강제적/악의적 개방이다. 개방이란 익명을 전제하지 않는다. 만일 작가 이현이 주인공 연보라로 하여금 그 ‘누군가’를 알아낼 수 없게 했다면 이 이야기는 ‘익명성’이 갖고 있는 폭력의 문제를 덮어두는 미봉책으로 남게 되고, 작가가 채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식을 허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뻔 했다.

그런데 현명하게도 작가 이현은 타협을 한다. 연보라로 하여금 적극성을 갖고 그 인물을 찾아내는 수단을 강구하게 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연보라로 하여금 그 익명의 존재들을 함구하게 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알고 있었던 듯싶다. 폭로란 의도적/강제적/악의적임을. 결국 자신이 이 소설을 통해 다루고 싶었던 두 가지 스캔들, 학교 조직 내의 폭력, 사이버 공간 속에서의 폭력의 문제는 마냥 까발린다고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임이 아님을.

문은 구별을 위해 존재한다. 문을 공간을 가른다. 현실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카페의 문,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단 것을. 또한 용기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익명을 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소설의 후반부에서 몇몇의 아이들은 자신의 가면을 벗는다. 그렇게 떳떳해진다. 그렇게 성장해 나간다. 평온한 자신의 세계와 험난한 세상 사이에 놓인 문을 열 용기는 자신을 덮어준 포장을 벗는 것에서 비롯된 다는 것을.

또한 문은 닫기 위한 것이다. 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된 폭력, 외부에서 안쪽을 향해 열리는 철문을 닫기 위해서도 용기는 필요하다. 약자는 힘이 없다. 그 철문은 소수자 한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닫히지 않는다. 용기 있는 소수자들의 협동으로만이 그 문을 닫을 수 있다. 아이들은 선택했고, 부당함에 맞섰고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했다. 온전히 철문을 닫는데 성공할 수는 없었어도, 절반의 성공, 청소년기에서 어찌 보면 최선에 속할 성공을 한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아이들의 미래가 장밋빛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아직 이들이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양심의 귀를 저당 잡혔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아이들의 미래가 장밋빛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아직 이들이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양심의 귀를 저당 잡혔기 때문이다.

영혼의 지반으로 말하자면 변화 가능한 아이들이 더욱 강하다. 변화는 유동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능하지 못한 굳어버린 영혼의 소유자는 그래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적극성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기성의 질서 속에서 위치된 자기 자리에서 조금의 변동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약한 인간이 쓴 가면은 얼굴을 가린 가면이 아니라 자기 양심을 가린 가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참 불편하다. 결코 통쾌할 수 없다. 이중의 좌표에 놓인 교사들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에 교사들이 봐야한다. 이중 좌표가 하나의 선명한 점으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다. 하나의 레이아웃을 들어내는 법. 그러나 그 역시 현명하지 않다. 이미 그들은 기성의 세대 속에 속한, 상대적 기득권자이고, 생활인으로서 두 가지 레이아웃을 갖는 것이 그들을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라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면, ‘아무리 애를 쓰고 들어보려 하는데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있다. 바로 내면의 목소리이다. 익명의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지, 영혼에 씌웠는지 이 대답은 오직 독자 개개인만이 할 수 있다.

이런 소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상에서의 익명성의 폭력을 평소 심각하게 생각해 온 내게, 그릇된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폭력을 심란하게 생각해 온 내게, 이 소설을 전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건강하다. 그래서 반갑다? 글쎄,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김영욱 시민기자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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