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삶이 만든 `올 노벨문학상`
파란만장한 삶이 만든 `올 노벨문학상`
  • 북데일리
  • 승인 2007.10.1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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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88)은‘너무 늦게 호명된’ 작가이다. 노벨 문학상 역사상 최고령 작가로 기록될‘88세’라는 나이에 와서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작품세계, 문학사적 업적은 이미 명성을 얻은 지 오래. 영국 문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유럽 유수의 문학상을 휩쓴 대가로 손꼽힌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문학 전공자조차 고개를 젓는 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도리스 레싱 : 20세기 여성의 초상>(동문선. 2004)의 저자 민경숙 교수(용인대학교 국제학부)는 “그의 작품은 워낙 방대하여 한 권의 책에 그 모든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독특한 서술 기법, 다양한 장르, 폭넓은 세계관은 도리스 문학의 구심점이다. 대표 작 중 하나인 <황금 노트북>(1962)은 논픽션, 신문기사, 수기, 일기 등 다채로운 형식을 선보인 실험 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SF 장르를 써내는 등 변화무쌍한 집필력을 선보이고 있다.

도리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작품 중 상당수가 자전적 성향을 띠기 때문. 이란에서 출생해 아프리카에서 25년을 보냈고, 현재는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의 파란만장 성장기를 압축해 살펴본다.

▲‘도리스’라는 이름

도리스 레싱의 아버지 알프레드 쿡 테일러는 콜체스터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근무하던 은행 근처였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던 할아버지는 대조적인 성격의 할머니와 잦은 불화를 겪었다. 아버지 알프레드 역시 어머니 에밀리 모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원치 않던 어머니의 임신, 아들이 아닌 딸의 탄생이라는 이유로 도리스의 탄생은 축복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집게로 아이를 꺼내야 하는 난산 이었다. ‘도리스’라는 이름도 부모의 사랑이 아닌 수술을 맡은 의사에 의해 얼떨결에 만들어 졌다.

도리스는 후일 이런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성질이 괴팍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까다로운 아이, 도리스

도리스는 육아기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어머니는 페르시아의 우유가 묽다는 사실도 모르고, 우유를 희석해 도리스에게 먹였다. 그 결과 아기는 늘 배고픔에 울어야 했다.

이로 인해 도리스는 까다로운 아기로 낙인 찍혔다. 어머니는 가정부에게 도리스를 맡겼고, 아기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 가정부는 자주 짜증을 냈다. 동생 해리가 태어나자 도리스의 성격은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거부되던 사랑이 동생에게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 이후, 도리스는 반항적 성격을 갖게 됐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5부작 <폭력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억압적 어머니’ 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 됐다.

▲아프리카, 인종차별의 부당성

1924년 영국에서 6개월간 휴가를 보낸 도리스의 가족은 아프리카 이민을 결심한다.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가면 옥수수 농사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선전에 현혹 된 것.

덕분에 소녀 도리스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자연을 마음껏 접했다. 영국으로 돌아 간 후에도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경관을 칙칙한 런던과 비교하곤 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농장 경영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는 광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엎친데 덮진 격으로 당뇨까지 악화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나빠지자 아버지는 원주민 노동자에게 불평을 쏟아 냈다.

도리스는 비참한 생활을 꾸려 가던 원주민 일꾼을 보며 인종 차별의 부당성에 눈뜨게 됐다. 당시 목격한 농장 생활은 처녀작 <풀잎을 노래한다>로,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는 <마사 퀘스트>로 재탄생 됐다.

▲미칠 듯한 글쓰기와 두 번의 이혼

14세에 학교를 중퇴한 도리스의 탈출구는 바로 ‘독서’였다. 고전 뿐 아니라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했다. 시를 짓기 좋아했고,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단편 소설을 써 잡지사에 투고하기도 했다.

17세쯤엔, 장편 소설에 대한 열망이 움텄다. 두 편을 썼지만, 실패작이라고 생각해 폐기해 버렸다. 보다 철저한 연습을 하기 위해 단편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그러나, 마냥 글만 쓸 수는 없었다. 돈도 벌어야 했다. 야무진 도리스는 타이핑과 속기를 배워 전화교환원 일을 얻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책읽기만은 놓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투르게네프 등을 쉼 없이 읽었다. 좌익 잡지 ‘뉴스테이츠맨’을 구독하게 된 것도 이때.

도리스는 같은 잡지를 보던 공무원 프랭크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공무원이라는 남편의 직업 덕분에 가정은 점점 안정되어 갔다. 언뜻 보기에, 무난한 결혼 생활이었다. 불행은 몸 안쪽에서 움트고 있었다.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를 추구하던 도리스. 그는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벗어버리고 싶어졌다.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을 좌익 독서 클럽으로 인도 했던 도로시 슈바르츠를 만나게 됐다. 이 계기로 지하 과격단체에 가입해 맹렬한 정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프루스트나 울프를 읽던 도리스의 관심사는 레닌, 마르크스, 스탈린으로 옮겨 갔다. 열띤 토론과 독서를 통해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개인적인 관심보다 자신이 속한 단체, 공통체에 대한 책임의식, 연대의식에 비중을 뒀다. 두 번째 결혼도 이때 이뤄졌다. 상대는 독일인 망명자 고트프리트 레싱이었다. 물론, 이 결혼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각고 끝에 펴낸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가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그는 실력 있는 신예로 급부상 했다. 이 작품의 판 권 대가로 받은 돈은 선금 1백 50파운드. 도리스는 작가라는 직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타이피스트의 일자리를 얻었다. 고트프리트와는 1948년 이혼했다. 그녀 인생의 두 번째 이혼이었다.

이어 1954년 완성한 단편집 <다섯>으로 서머싯 몸상 수상, 1962년 <황금노트북> 발표, 1979년 메디치상, 1982년 독일의 세익스피어상, 오스트리아의 유럽 문학상을 수상했다.

도리스는 “여성의 가장 큰 죄악은 자기만족, 혹은 순응”이라고 부르짖는다. 자신의 삶을 뜻대로 개척해 온 것은 물론, 어떤 잣대에도 굴하지 않는 삶을 겪어 왔다. 그의 열정적 글쓰기는 계속 된다. 여전히 신작 집필에 몰두하고 있으며, 직접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www.dorislessing.org)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참고 자료 - <피부 아래에서>(도리스 레싱 저), <도리스 레싱 : 전기>(캐롤 클라인 저), <도리스 레싱 : 20세기 여성의 초상>(민경숙 저)

(사진 - 민음사 제공)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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