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래극]②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노래극]②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북데일리
  • 승인 2005.10.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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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는 시인 김태정의 시집 <풀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에 대한 기사 형식을 `시노래극 극본`으로 써 보았습니다. 그동안 시와 시집에 대한 전문가들의 서평이 일반독자들의 정서나 취향과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렵고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는 판단입니다. 북데일리는 시평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독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노래하고 시집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 편집자 註

-제2막-

◇나오는 사람들

태정 : 갓 입사한 조원

어매 : 태정의 어머니

윤씨 : 해남 할머니

사장 : 공장 사장

막이 오르면 태정, 정 들었던 서울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오래된 방을 정리하다 툭 터지는 울음.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네루다 시집 속엔/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먼지 때문에/....../꽃도 십자가도 없는/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그만 눈물이 나왔네/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눈물의 배후`중에서‘)

하행선 기차 타고 도착한 곳, 해남. 윤씨할머니와 저녁 밥상을 마주한다. 정태춘의 ‘고향집 가세’ 노랫소리 구성지다.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태아처럼/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달마의 뒤란’중에서)

해남 달마산 아래 미황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반야심경’. 땅끝에서 듣는 김미현의 ‘반야심경’, 애간장을 녹인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불생불멸......불생불멸......//꽃살문 너머/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며/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미황사’중에서)

뒤란 장독대에서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 김민기의 ‘아침바람’ 노래 소리에 맞춰 기러기 우는 소리 처량하다.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이맘때쯤 눈물은/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가을 드들강’중에서)

깜빡 졸다가 사천왕상을 한 공장사장의 호통소리! 노찾사의 ‘사계’가 빠르게 돌아간다.

“부업이나마 한 일년/코일을 감고 나사를 돌려도/시급 2,000원의 밥을 모른다는 말씀//......//요 시인, 철없는 시인/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만/생업과 부업의 차이//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그것만 알고 있어라”(‘부업’중에서)

놀라 깨어 반질반질한 미싱같은 호마이카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밥알들.

“빈둥빈둥 놀면서 세끼 밥을 대한다는 것은/정말 자존심 상하는 노릇이다/단 한번이라도/밥상머리에 당당히 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리라/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면서 쉽게/시를 쓰듯이 정말 쉽게 밥을 먹는 것이/얼마나 눈물 나는 이 시대의 코미디인지를”(‘거식증’중에서)

노래극에는 관심 없고 달팽이처럼 더듬이질 하던 관객, 뻘줌하여 고개를 숙인다. 갑자기 품에서 샤프연필을 꺼내는 태정. 객석, 눈이 휘둥그레진다.

“손끝의 긴장은/자꾸만 심을 부러뜨리고/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낳고/기호와 눈치뿐인 시를 낳고/무능력자로 낙인 찍힐까 두려워하는/시인을 낳는다//뭘 그까짓 샤프하나 땜에 주눅드느냐고 비웃지 마라/손끝의 가벼움인지/손끝의 자유로움인지/가벼움도 자유도 여유도 애교도 뭣도 아닌/풍자도 은유도 거세된 시인이여/그 ‘적당히’가 적당히 안되는 불온한 시인이여”(‘샤프로 쓰는 시’중에서)

이내 씽긋 웃으며 샤프연필 끝으로 손톱을 다듬는다. 그러더니 작은 창이 달린 해우소에 털썩 앉는다. 어두워진다. 틈으로 장사익의 ‘동백아가씨’ 걸쭉하게 새어나온다.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두칸짜리 해우소/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슬픔도 기쁨도 다만/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동백꽃 피는 해우소’중에서)

밝아지면 바닥에는 동백꽃 흐드러지게 깔려있고, 배경에는 파란 물푸레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안치환의 ‘사랑하게 되면’ 흘러나온다.

“물푸레나무는/물에 담근 가지가/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물푸레나무라지요/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그건 잘 모르겠지만/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그것은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어쩌면 나에겐/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물푸레나무’)

노래 계속 흐르고, 출연자 모두 나와 손에 손을 잡고 인사를 한 후, 물푸레나무숲 속으로 들어간다. 관객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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