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상흔 `왜 호랑이는 바다로 갔나`
80년대의 상흔 `왜 호랑이는 바다로 갔나`
  • 북데일리
  • 승인 2005.10.0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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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적인 위험한 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때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게 또 다 나쁜 인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의미가 없다고도 물론 생각하지 않고, 적어도 다시 만났을 때는 의미가 생길 수밖에 없단 말이지. 사람 사이에 동질감이나 유대감은 중요한거야, 그걸 느끼는 순간부터 서로 타인이 아니거든.”

삶의 경계에 서있는 외로운 자들을 소묘하는 작가 윤대녕의 신작 <왜 호랑이는 바다로 갔나>(생각의나무. 2005)는 80년대 고통의 공통분모를 새로운 형식과 화법으로 완성해 낸 윤대녕 문학의 새로운 지평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제주도에 있었다.

“유년시절의 꿈이 물위를 뛰는 것이었다.”고 고백한 윤대녕은, 오래된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물과 바람이 공존하는 제주도에서 <왜 호랑이는 바다로 갔나>를 써내려 나갔다.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소설의 시공간은 직장생활을 하며 등단했던 주인공의 과거와 직장을 그만두고 잡지사에서 주어지는 비정기적인 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현재를 부유(浮遊) 한다.

그 간격에는 80년대가 부르짖었던 민주화항쟁이 남긴 혈흔과 현재의 한국이라는 지형과 국적에 대한 고뇌가 공존한다.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의 죽음과, 가족의 균열,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의 목격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상처와 불안은 호랑이라는 환각으로 나타나 그를 엄습한다. 윤대녕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호랑이를 목격하는 주인공의 불안정성을 시대전체에 대한 조율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확장의 방법은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과감한 혼재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윤대녕 문학의 형식적 도약을 예고한다.

소설은 때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교차편집을, 때로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떠오르게 만든다.

윤대녕의 신작과 이누도 잇신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호랑이’ 와 ‘물고기’라는 단어사이에서 기묘한 방법으로 그 교집합을 갖는데, ‘호랑이’라는 존재가 소설 속에서는 두려움과 고통의 의미를 갖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호랑이’라는 존재가 주인공 조제에게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 용기의 계기로 등장한다.

반면, ‘물고기’라는 존재는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의 ‘동경의 대상’이라는 같은 의미로서 존재한다.

특별한 관계성이 없는 두 남녀가 동일 거주 공간이나, 동선의 경로에서 만나 건조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설정은 기존 윤대녕 문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지만, 제주도라는 이질적 공간과 서울이라는 현실적 공간을 3인칭 화자와 영빈이라는 존재로 오가는 화법은 분명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2년간의 제주도 칩거생활은 윤대녕에게 맺혀있던 386세대의 상실을 보듬어 내는 과제를 풀어낸 힘과, 새로운 형식적 시도에 대한 도전의 바람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윤대녕의 소설 속 인물들은 늘 지워내고 싶은 기억을 안고 삶의 언덕을 힘겹게 오르내린다.

그들은 외롭지 않다는 주술을 끊임없이 되뇌이지만 실은 그 짐을 함께 덜어낼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는 외로운 존재들이다. 윤대녕의 신작이 기존의 작품과 다른 가장 큰 차별점은 바로 이러한 외로움의 본질이 개별적 관계의 실패가 아닌 시대가 준 고통이라고 전체를 지목하는 시선이다.

독자에게 <왜 호랑이는 바다로 갔나>는 로드무비처럼 다가온다. 2년간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이 낳은 신작의 바다 내음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랜 시간 가시지 않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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