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래극]①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노래극]①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북데일리
  • 승인 2005.10.04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는 시인 김태정의 시집 <풀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에 대한 기사 형식을 `시노래극 극본`으로 써 보았습니다. 그동안 시와 시집에 대한 전문가들의 서평이 일반독자들의 정서와 취향과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렵고 선뜻 다가가기 힘들다는 판단입니다. 북데일리는 시평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독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노래하고 시집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 편집자 註

-제1막-

◇나오는 사람들

태정 : 갓 입사한 조원

영미 : 고참 조원

경자 : 조장 언니

산타 : 태정의 아버지

그 : 태정의 연인

무대에 불이 켜지면 영미, 어지러운 식당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천천히 일어서며 노래를 부른다.

“잔치는 끝났다/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중에서)

영미의 축 처진 어깨 뒤로 조명이 꺼지고, 10년 뒤. 이른 봄 노루귀꽃 같은 눈망울의 태정이 방안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몇 숟갈 뜨는 척 마는 척 하더니 쓸쓸한 노래를 부른다.

“이제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시가 밥을 속이는지/밥이 시를 속이는지/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호마이카상’중에서)

다시 10년 전. 태정은 연인과 서울의 변두리 골목길을 걷고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고, 태정의 표정이 굳어 있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오버랩 된다.

“오년 뒤엔 뭐 하고 있을 거냐고 그가 물었다...... 그 물음의 쓸쓸한 의도를 알아차려 문득 슬픈 나는 오년 뒤 서른다섯.//......//오년 뒤? 아마 저기서 아이들 코를 닦아주고 있겠죠 뭐......, 그때 나는 서투르고도 어수룩한 갓 서른이었으므로.//......//오년 뒤를 물어보던 그 폐허에서 그를 비껴간 대답처럼 그의 절망을 비껴간 나는 여전히 할말이 없어 부끄럽고.//먼지바람 자욱한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문득 두려워졌다. 평지에 발을 딛는 순간 비탈 위의 기억들이 재가 되어버릴까봐. 때묻은 작업복과 해진 운동화, 문 닫힌 공장과 늦은 밤 미싱 소리, 낮은 골목길의 담배연기, 긴 축대 끝의 달맞이꽃, 그의 눈빛만큼 고단했던 시절들이 먼지로 날아오를까봐.” (‘낯선 동행’중에서)

겨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랑을 잃고 부르는 노래, 아프다. 안치환의 ‘연탄 한 장’ 깔린다.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이제 우리 겨울산이다/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추운 애인아/누더기라도 벗어주랴/목도리라도 둘러주랴/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배고픈 애인아/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겨울을 살자/이 겨울을 살자"(`겨울산`중에서)

꿈에 나타난 아버지. 태정의 방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전거를 타고 밤하늘로 날아간다. 러시아 민요 ‘기러기’ 구슬프게 흐른다.

“바람 부는 성탄 전야/쏟아지는 잠을 쫓으며/그림동화 원고를 메운다/삼십여년 전의 아비가 되어......//......//시인도 되지 못하고 소설가도 되지 못한 아비/아침이면 식구들의 양식이 되고/아이들의 양말이며 운동화가 될 원고지에/아비는 좌절된 해피엔딩을 꿈꾸었을까”(‘슬픈 산타’중에서)

꿈속에서 허방질을 하다 일어서는 태정. 컴퓨터 앞에 앉는다. 장필순의 ‘가난한 그대 가슴에’, 허스키한 목소리 들린다.

“몇주째 견뎌오던 보릿고개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가 될 글을 쓴다//......//나의 밥줄 286 앞에 앉아/빼고 더하고 곱하고 나누고 엮어/봄나물 다듬듯 글발을 다듬으니//웬일인가/그토록 안 받던 화장발이/쥐어짜도 안 나와주던 글들이/시원스레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한다//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궁핍이 나로 하여’중에서)

영화 “접속”의 주제가 ‘사랑의 송가’가 흘러나오는데, 과거로의 접속은 자주 끊긴다.

“흔적을 사냥하는 광견의 시대 팔공년대를 통과하면서 천기누설공포증이라 해도 좋을 풍토병을 다만 아웃사이더였을 뿐인 나까지 덩달아 앓았으니/....../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와 286과의 암묵적인 약속, 수상한 문자는 깨끗이 지워준다는 불온한 유전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는 외계와의 교신은 완벽하게 끊어준다는 알리바이를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나는 철저하게 맹신한다” (‘나의 아나키스트’중에서)

도리구찌 모자를 쓴 중년의 시인, 영미에게 추근대다 급소를 얻어맞는다. 헉!

"순도 백퍼센트를 내세우고도 모자라/순, 진짜만을 부르짖는 예술순교주의파 시인들이/

점잖게 경멸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힘을 준다는 것/견디게 해준다는 것/시와 욕은 그래서 하나라는 것/이것이 나의 시론이고 개똥철학일 수밖에" (`시의 힘 욕의 힘`중에서)

?

이때 울리는 전화벨소리. 공장에서 인정 많기로 소문난 경자언니다. 노래는 김민기의 ‘이 세상 어딘가에’.

“보세요 당신/그 거친 손에서 달구어진 아이롱처럼/이밤사 순결하게 달아오른 별들을/따버린 실밥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활발해지는 이 어둠의 풍화작용을/보세요, 땀방울 하나 헛되이 쓰지 않는 당신/누구의 땀과 폐활량으로 오늘밤/하늘의 사막에 별이 뜨는지”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중에서)

경자언니 손을 잡고 무대 가운데로 나오면서 노래를 부르면,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살에는’이 흘러나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은근하게도 씁쓸한 맛/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중에서)

무대 위에서 청매화 꽃잎이 하늘하늘 내려오면서 막이 내린다.

(2편에 계속)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