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슬픔과 향수가 아련히...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책속의 명문장] 슬픔과 향수가 아련히...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25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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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글 양억관 옮김 / 민음사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과거의 추억이 담긴 한 순간을 영화의 한 장면 처럼 묘사한 아름다운 글이 있다. 

"그녀의 집 거실에 있던 야마하의 그랜드 피아노. 시로의 꼼꼼한 성격에 맞게 늘 조율이 잘되어 있었다. 티 하나 없이 맑게 윤기를 띤 표면에는 손가락 자국도 없었다. 창으로 비쳐 드는 오후의 햇살. 정원의 사이프러스가 늘어뜨리는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는 레이스 커튼. 테이블 위의 찻잔. 뒤로 단정하게 묶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악보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길. 건반 위에 놓인 열 개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페달을 밟는 두 발은 평상시 시로를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될 만큼 힘차면서도 적확했다. 그리고 종아리는 유약을 바른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연주를 부탁하면 그녀는 곧잘 그 곡을 쳤다. ‘르 말 뒤 페이’.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향수 또는 멜랑콜리.” (p.80~p.8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에 나오는 글이다. 책은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는 젊은 남자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책 제목이 길기도 하려니와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등학교 때 쓰쿠루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대학생이 된 후 이유도 모른 채 그들에게 추방당한다.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그들 넷은 우연한 공통점이 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과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다자키는 처음부터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p.13~p.14)

그렇다면 ‘순례를 떠난 해’는 무슨 뜻일까.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후 늘 혼자였던 쓰쿠루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후배 하이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음악을 좋아한다. 어느 날 둘은 피아노 곡을 듣게 된다. 조용하고 애절함이 가득한 음악이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로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에 들어 있는 곡이었다.

“르 말 뒤 페이. 프랑스어예요. 일반적으로는 향수나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 (p.78~p.79

그 곡은 마침 쓰쿠루의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자주쳤던 음악이었다. 들을 때마다 그는 참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다. 아련한 슬픔이 가득한데도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름다운 음악이 그립고 옛 추억이 떠오르는 비오는 가을날이 가고 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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