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기다린' 백민석 작가 소설 재 출간
'작가들이 기다린' 백민석 작가 소설 재 출간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24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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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백민석 글 / 한겨레출판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작가들이 기다려온 작가가 있다. 1990년대 한국 문학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백민석이다. 그간 절판되었던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한겨레출판. 2015)이 재 출간됐다. 그는 2003년 갑자기 절필을 선언했다 두 해 전 복귀했다. 이 소설집에는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어려서 장원莊園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했던 ‘나’가 장원을 다시 찾으며 시작된다. 십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장원은 그가 잊어버리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다. 돌담이 오백 미터나 된다.

“화강암 덩어리를 붙여 이은 끝없는 돌담, 그 위로 넘겨다보이는 울창한 수목 정원, 여름이면 어찌나 우거지는지 아주 새까맣게 보이는 그늘들, 그러면서도 기름져 윤이 흐르는 그늘들 (중략)” (p.44)

심부름꾼이었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또래 아이들처럼 책가방을 챙기는 대신 작은 수첩과 볼펜을 챙겨들고 장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많은 수의 물통에 샘물을 받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다. 그 집에는 외국인 초등학교에 졸업반 학생으로 다니는 도련님 aw가 있었다. 형제가 없던 aw와 나는 다른 사람이 없으면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질투했다. 나는 뛰거나 걸을 때 마다 쿵쾅 소리가 나서 집사나 하녀장에게 주의를 받곤 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쿵쾅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움직임은 가볍고 날렵했으며, 피부는 맑고 투명했다. 나는 그의, 그 우아한 걸음걸이를 베끼기 시작했다. (중략) 내가 aw의 걸음걸이를 베끼는 데는 한 달이면 족했다. 한 달 만에, 마룻바닥을 걷는 내 발바닥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걸음걸이를 베끼는 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aw의 표정을 베끼기 시작했다. 그의 매끈하고 창백한 얼굴 아랫단에 달려 있는 빨갛고 얄따란 입술이 나를 끌어당겼다.” (p.70)

나는 그의 미소를 베꼈고 그의 목소리와 어투를 베꼈다. 나는 aw가 읽으라고 준 책이 아니라 그를 읽었다. aw의 일기를 읽으며 나의 질투는 정점에 달했다. 그의 일기 문장은 그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탐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의 문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고 훈련이 잘 돼 있었다.

“aw : 럭비공을 던졌다 받는 반복적인 작업은 어떤 땐 바보처럼 느껴진다. 공은 그저 왔다 갔다 한다. 거기엔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태양이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면, 내 안엔 어떤 환희가 움튼다.

나 : aw와 공놀이를 했다. 내가 던지면 aw가 받는다.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재미있는 놀이다. 이따금 너무 오래 놀아서 지겨워질 대도 있지만, 숲에 빠질 때면 정말 짜증 난다.” (p.82~p.83)

aw의 일기를 훔쳐보며 베끼는 일에 실패한 나는 그의 가장 최근의 일기를 읽는다. 그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이었다.

“가르쳐주고 싶다, 심부름꾼 아이 너에게는 나만 한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읽어도 나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할 순 없다는 것을. 너는 영혼이 텅 빈 아이라는 것을.” (p.84~p.85)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재벌 아들인 친구로 자신의 신분을 속여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영화 ‘리플리’가 떠올랐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aw의 모든 것을 베끼려 노력하는 나와 겹쳐졌다.

또 다른 소설 <검은 초원의 한편>은 자신의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 '초원을 키우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사는 il의 이야기다. <이 친구를 보라>에서는 가난 때문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도와야 했던 내가 주인공이다.  <인형의 조건>은 인형 뽑기 기계에 정신없이 동전을 쏟아 넣고 버튼을 눌러대는 ru가 등장한다.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은 인물이 나온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현실도 다소 어둡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자기 고백적인 내용들이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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