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하늘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키 작은 누이 같고...'
문태준 시인 '하늘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키 작은 누이 같고...'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18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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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문태준 글 / 마음의숲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가을이 되면 어딘지는 모르지만 자꾸 가고 싶은 곳이 여러 군데 있게 마련이다. 가을이 되면 내게도 그렇게 마음이 자꾸 끌리는 곳이 네댓 군데 있다. 억새가 핀 제주도 오름이 첫 번째 그곳이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물고기 비늘처럼 햇살이 부서지는 가을 강을 따라 느리게 걷는 일도 좋다. 토란을 베고 있는 시골 밭가에 앉아도 좋고, 도토리가 떨어지는 떡갈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의 살결을 만져 보아도 좋다.“ (p.130)

‘맨발’이라는 시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문태준의 산문집 <느림보 마음>(마음의숲. 2013)이 휴식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자연, 고향, 가족, 삶, 비움, 느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볼품없어 보이는 참깨꽃, 햇배, 도토리 등이 그의 사유와 글을 통해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시인은 집 마당에 널린 빨래들을 보면서도 특별함을 느낀다.

“나는 가끔 이발관이나 세탁소, 그도 아니면 우리 집 마당에 널린 빨래들이 바람과 햇살에 보송보송 말라 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런 풍경을 떠올리면 가슴 한 모퉁이가 밝아진다. 이 풍경에 내 마음을 슬쩍 얹어 보고 비추어 본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저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올려 본다.”

비가 오는 모습도 시가 된다.

“마른 번개가 치더니 비가 시작된다. 오늘 하늘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키 작은 누이 같다. 돌풍이 불고 빗방울이 굵어진다. 넓은 잎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내 귀도 함게 두들긴다. 내 귀도, 수국의 푸른 잎도 비을 말을 듣는다. 작고 길쭉한 나의 귀를 만지며 오동잎처럼 크고 푸른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235)

책에는 고향의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한다. 특히 ‘노모’에 대한 글이 절절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어머니를 보면 한 채의 앉은뱅이 집을 보는 것 같다. 아귀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벼락도 맞고 늦 눈보라도 맞아 이제 어머니는 별로 성성한 곳이 없다. 층층시하 자식을 두었지만 어머니의 품은 갈대의 품처럼 거칠고 삭막하기 그지없다. 다리는 사슴보다 여위었고, 살갗은 옻처럼 검어졌다. 어머니는 어느새 조백했다. 한 꿰미의 북어를 사 들고 기뻐 돌아오던 어머니의 환한 미소는 어디로 갔을까.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이 나는 내 어머니의 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감꽃 져 내리던 날, 텅 빈 마루에 홀로 넋을 놓고 계시던 내 어머니의 젊은 시절도 떠나보낼 수가 없다. 흰떡을 좋아하시는 내 어머니, 한 시루의 흰떡을 쪄 젊은 내 어머니에게 그리고 이제는 조백한 내 어머니에게 나는 돌아가야겠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그 나무 그늘에게로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280~281)

그의 글은 한 편 한 편 밑줄을 그으며 읽을 명문장들이 많다. 바쁜 일상에서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어느 때던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좋다. 잠시라도 삶의 속도를 되찾고 삶의 리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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