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희미한 옛사랑... 황석영 신작 '해질 무렵'
가을날, 희미한 옛사랑... 황석영 신작 '해질 무렵'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16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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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글 / 문학동네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봄에 처음 당신의 소식을 다시 접했는데 어느새 초록 짙던 나뭇잎들은 빛이 바래고 해질 무렵이면 서늘한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우리 나이가 계절로 치면 바로 이맘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해가는 기억처럼 우리의 젊은 날들도 앨범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에나 남아 있겠지요.” (p.169)

작가 황석영이 <여울물 소리> 이후 3년 만에 신작 소설 <해질 무렵>(문학동네. 2015)을 내놓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는 60대의 건축가 ‘박민우’와 20대의 젊은 연극연출가 ‘정우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읽다보면 가슴 아릿하다. 박민우는 멀지 않은 미래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고, 정우희는 열심히 살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픈 젊은이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민우는 성공한 건축가다. 어느 날 강연장에 찾아온 젊은 여자가 연락처가 적힌 쪽지 한 장을 건네준다. 그가 고교시절 만났던 첫사랑 ‘차순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와의 전화 통화와 이메일은 그를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너무나 가난했던 산동네 시절, 그에게는 공부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차순아와의 짧은 사랑을 뒤로하고 서울의 일류대 입학과 유학, 결혼을 통해 지금까지 성공 가도를 달려온 박민우.

“컴퓨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새로운 주택 부지를 찾으며 맞춤한 곳에 집 짓는 상상을 하는 게 요즘의 내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그 집에는 함께할 가족이 없다. (중략)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p.195~p.196)

이제 그에게는 시간도 사람도 일거리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장편소설로 소개된 이 책은 200쪽 정도의 분량으로 다소 짤막한 느낌이다.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인물들과 사건의 전개로 술술 읽힌다. 작가는 이것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주인공은 유신시대, 광주민주화항쟁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에게 그 사건들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대로 ‘저물어가는 세대가 들려주는 회한’ 쯤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요즘 같은 늦가을과 어울리는 소설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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