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온 소포` 풀어 본 시인, 시큰한 콧등
`늦게 온 소포` 풀어 본 시인, 시큰한 콧등
  • 북데일리
  • 승인 2005.09.2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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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도 날히언마라난 낟가티 들리도 업스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마라난 위 덩더둥셩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 아소 님하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업세라”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을 <악장가사>에 실린 ‘사모곡’중 일부다. 아버지가 들으시면 섭섭하시겠지만, 트롯 순위에서 모성애와 사모곡이 부성애와 사부곡을 따돌린 지 오래이니 더 이상 논할 바가 아닌 듯하다.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2000. 민음사)는 스물 한 살 꽃 다운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 해평 윤씨를 위해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을 따라 남해로 남해로 내려가며 부른 사모곡이다.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윤삼월 젖은 흙길을/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나루는 닿지 않고/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화전을 만들고 밤에는/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남해 가는길-유배시첩.1’)

나이 스물여덟에 장원급제하여 요직을 섭렵하다 지천명의 나이에 첫 유배를 당하고, 그 다음해 풀려났다가 다시 이듬해 남해로 유배를 가는 서포. 시인 역시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환란을 겪으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하여 서소문공원을 지나며 실직자들이 빗속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다가(‘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명퇴한 사람들과 같이 산을 오르기도(‘사람들 산에 오르다’)한다. 세속의 번민을 떨치려 잠시 절에 몸을 두었다가 마음에 탑 하나를 쌓고 부수곤 하다가, 꿈에 불쑥 나타나신 어머님의 모습.

“빗방울 굵어지는 소리 듣다 잠깐 자리에 들었더니 옥당의 서책 빌려다 놓고 필사본 엮고 계신 어머님, 돌아앉은 뒷모습이 구름 같아라. 평생 검은 옷 갇혀 너희는 남과 같지 않으니 배움에 한층 깊어야 한다. 곤궁한 들판에 짧은 곡식 얻고 나면 논어 맹자 중용 먼저 바꾸고 손수 짠 명주를 팔아 춘추좌씨전을 사던 날 손끝에 피멍 맺혀 밤새 잠들지 못하더니, 저 건너 사람의 마을 불빛 꺼지고 자애로운 무릎에 앉아 唐詩를 배우던 어린 날 철없이 따라 읊던 사모곡 숨은 뜻이 이토록 아프구나. 나이들 때까지 가르치는 이 따로 없어 오직 한 분 스승이었던 어머님, 눈물로 회초리 꺾어 이 깊은 적막 떠나보낸 뒤 봉창에 들치는 찬 비바람 슬픔의 잔뿌리 쓰다듬으며 어둠속 묵묵히 홀로 깨어 견디실라.” (‘꿈에 본 어머님-유배시첩.5’중에서)

팔선녀와 노닥거리다 꿈에서 깬 성진이 인생사 일장춘몽임을 깨닫듯, 시인도 꿈에 어머님을 뵙고 얻는 바가 있었는가.

“눈 맞고 선/저 소나무/제 몸에 맞는 무게만큼/휘어졌다가 고개 들고/등허리 낮췄다 다시/펴는 법 가르쳐주려고/어젯밤엔 그 푸른/팔뚝 하나/뚝, 부러뜨렸구나.//네 밑에 서서/눈이 멎길 기다리다/나, 이마에 솔방울만한/혹 하나 달고/폭설 속으로/오던 길 돌아간다” (‘참회’)

“날 저물고/모두 하산한 뒤에도/꿈쩍 않고 그 자리 지키는 산감나무/세상의 모든 상처, 고약 같은/까치밥 한 알/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그것/끝까지 놓지 않으려고/온몸 뒤틀며 혼자 견딘 것이/흉터에 새 살 밀어올리는 그것/얼룩의 힘이라니/여태까지 나를 키운 것도/까치밥이었구나” (‘산감나무’중에서)

머리에 솔방울만한 혹을 달고 터진 홍시 이마에 묻히고, 겨울 산길을 걷는 시인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시인은 그러나 긴 겨울을 보내며 우리에게 참으로 따뜻한 편지 한 통을 보내온다.

“봄볕 푸르거니/겨우내 엎드렸던 볏짚/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손 따숩게 들춰보아라./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이 바람 끝으로/옷섶 한 켠 열어두는 것/잊지 않으마./내 살아 잃어버린 중에서/가장 오래도록/빛나는 너.” (‘남으로 띄우는 편지’)

추운 곳에 있는 사람만이 남으로 따뜻한 편지 한 통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러자 이에 화답하듯 늘 한데 계시면서 아들의 안부를 묻는 어머니의 두툼한 소포가 막 도착했다.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찌든 생활의 겉꺼풀도 하나씩 벗겨지고/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글썽글썽 녹고 있다” (‘늦게 온 소포’)

이 밤, 어머니 품처럼 따스한 소포를 받고서 잠들지 못하는 사람 있으리라. 밤새 뒤척이며 고향생각, 어머니 생각에 꼬깃꼬깃한 포장지를 풀었다 여몄다 하는 사람들... 객지생활에 찌든 마음에 훈풍을 불어주는 ‘늦게 온 소포’가 행여 문밖에 와 있는 지 남향의 문을 열어보자. 지금...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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