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브레히트, 카프카...獨 작가들의 단편 모음
릴케, 브레히트, 카프카...獨 작가들의 단편 모음
  • 북데일리
  • 승인 2007.05.21 0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어린 시절, 어머니는 열세 평짜리 집에서 넉넉지 못하게 살면서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책만큼은 꼭 사줘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맹모삼천지교나 김만중의 어머니가 베를 잘라 팔아 그 자리에서 책을 사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극한 정성이었습니다. 덕분에 좁은 집은 대백과사전을 비롯해 위인전집과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등 각종 전집류로 책장이 그득했습니다. 친구 어머니들께서도 저희 집에 놀러가서 책을 보고 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꼬마 때부터 모 출판사의 방문 판매 아저씨와 참 친했습니다. 아저씨는 저희 식구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아시는 터라, 신간이 나오기가 무섭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셨거든요. 으레 영업하시는 분들이 그렇듯 늘 까만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시는, 걸까리진 분으로 여름이면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던 아저씨였습니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아저씨 성함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할 정도니까 책을 통해 다져진 꽤나 돈독했던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동화책들은 참 잘 나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면서 멀리했던 어린이 도서들인데 요새 우연찮게 읽을 기회가 많아져 틈날 때마다 한두 권씩 들춰보는데, 이야기는 물론이고 기획부터 삽화까지 촘촘하고 다채로워 감탄하면서 보았습니다. 각종 영상매체들에 대항하느라 힘든 진화과정을 거친 것 같아 안쓰러웠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며 책을 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해 반가웠습니다.

작년 여름, 서점에서 들춰보다 덥석 집어왔던 책이 있습니다. <얌전한 레슬러>(하늘연못. 2006)라는 책이었는데, 표지에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레슬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9살부터 99살까지, 동심에 바치는 책’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표지를 대하는 순간, 갑자기 밤에 이불 속에서 스탠드를 켜고 부모님 몰래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그 때가 떠올라 코끝이 아릿해졌습니다. 오늘은 그 아릿함을 여러분들께도 소개해 드릴까합니다.

누구라도 집어들었을지 모릅니다. 스물 네 명의 내로라하는 독일 작가들의 단편들을 모아 엮어놓은 책이었는데, 그 이름들이 내뿜는 힘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죠. 프란츠 카프카에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슈토름,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외덴 폰 호르바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 책을 집지 않고 돌아설 이, 누가 있을까요.

<얌전한 레슬러>에 실린 단편들은 읽기에 녹록치 않습니다. 9세부터는 아무래도 무리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스무 살 이상은 되어야 이 책의 의미를 반 이상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역자인 김재혁 교수는 (Verlag Neues Leben. 1985)라는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단편들이 환상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유와 역설 등의 문학적 기법이 많이 쓰여 짧은 이야기 안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이거나 교훈적이거나 잠언적인 성격을 지닌 이야기들도 꽤 들어있어 읽으면서 다양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용을 죽인 사나이’와 브레히트의 ‘대답’, 토마스 만의 ‘옷장’은 문학적으로도 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어 바투 다가왔던 작품입니다. ‘용을 죽인 사나이’에는 목적 이외에 아무 것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고고한 기사도 정신이 잘 드러나 있었고, ‘대답’은 브레히트의 작품답게 구성단계 곡선이 명확하고 극적인 부분 또한 절묘하다고 느꼈습니다. ‘옷장’에서는 토마스 만 특유의 서술과 은유가 드러나 있어 매우 흡족한 독서였습니다.

그밖에도 카프카의 ‘법 앞에서’나 테오도르 슈트롬의 ‘장미 정원과 힌첼마이어’, 에른스트 비혀르트의 ‘반지’는 많이 봐 왔던 형식이라 다소 전형적이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워낙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19-20세기 독일 문단의 획을 그었던 작가들을 한꺼번에 만나보는 일은 확실히 흔치 않은 행운입니다. 작가들은 단편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소개하고 있으므로, ‘맛보기’처럼 소설을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는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보시는 수고로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