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달 보며 불러보는 이름 `누나야`
한가위 달 보며 불러보는 이름 `누나야`
  • 북데일리
  • 승인 2005.09.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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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 시장 근처.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한 건물 4층 무도장에서는 뺑뺑이가 돌아간다. 목에 빨간 스카프를 맨 아저씨들이 ‘웰빙아줌마’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

오빠 : 밤과 새벽의 경계선, 주점에서 넥타이 맨 중년의 신사들을 호들갑스럽게 맞이하는 여인네들의 합창?

언니 : 쇼핑센터에서 여점원을 부르거나 식당에서 아줌마를 부를 때 쓰는 용어?

시간이 되면 너른 들판에 두 주먹 불끈 쥐고 서서 누님과 오빠와 언니를 불러보시라. 부르면 부를수록 참말로 다정다감한 호칭들인데, 시절은 가족 사이 뿐만 아니라 그 호칭까지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여기, 불과 삼십여년 전 문명이전의 세계로 돌아가 ‘누나야’ (2003. 시와시학사) 하고 슬프게 부르는 시인 반칠환이 있다.

“누나야/다섯 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땀 뻘뻘 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침대처럼 야무진,/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간호 대학에 간 누나야/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 마을/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머리 쓰다듬던 누나야/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누나야’ 중에서)

5남1녀의 가난한 집의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으리라. ‘아들 키워봐야 지 처자식만 위하니 다 소용없다’고 하는 대목이 아마 여기서 나왔을 게다. 대부분의 누이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도 ‘양념딸’처럼 부모님을 정성으로 모신다. 그러니 이땅의 아들들은 우리의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일이다.

“얘들아, 걱정할 거 없다. 산지기로 왔으니 집세 줄 일 없다. 살아보자, 남의 땅이면 어떠냐 몸만 건강하면 된다. 아랫돌 빠지면 윗돌 빼어 괴고, 윗돌 무너지면 아랫돌 빼어 얹자. 최씨네 품값 받으면 넷째 육성회비 주고, 열무단이나 뽑으면 막내 육성회비 주마. 언덕 너머 밭베 밭에 간 지 오래됐다. 반공일 날 일찍 와서 김매러 가자. 먹성 좋은 우리 엄마, 보리밥 썩썩 비벼 자시고 윗목에 쓰러져 주무신다. 홑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발꿈치에 쇠뜨기 움이 자란다.” (‘쇠뜨기’ 중에서)

사시사철 몸뻬 한 벌에 소처럼 일하시다 골방에서 주무시는, 어머니의 발꿈치에 돋아난 누런 굳은살이 애처롭다. 아버지는 풍으로 누워계시니 사실상 이 집의 가장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시인의 누님인 셈이다.

“눈 쌓인 동짓달 초나흗날이었지/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하셨다/아버지 머리 흔들어 깨우시나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어머니는 그 후, 더 이상 여성으로만 살 수 없었다/대마디 같은 손, 솔거죽 같은 발꿈치, 지게 진 뒷모습,/누가 내 기억 속 어머니의 사진에 아버지의 모습을 합성시켜 놓았는가” (‘아버지4’ 중에서)

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들짐승`같은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왔다. 고마리꽃처럼 슬픈 치맛바람이다.

“새 핵기 때도 선상님 인사 못 가고, 오늘랑은 비가 와서 묵장사도 못 나가게 생겼으니 열 일 제치고 늬 선상님께 인사나 갈란다./아이참 엄마, 안 오셔도 된다니까./안가도 되긴! 자식 매껴놓고 얼굴도 안 비춘다고, 선상님이 속으로 욕하신다./욕 안하셔./....../여름내 까맣게 탄 얼굴 더욱더 까매보이는, 손등이 껍질 벗기잖은 참낭구 괭이자루 같은, 비가 와서 묵장사를 못 나간, 예쁘게 화장한 시내 아이들 젊은 엄마들과는 너무도 다른, 선생님께 연신 허리 굽히며 아리랑 한 보루를 건네어 드리는, 너무나도 낯익어서 설고 부끄런, 쉰살이 훨씬 넘은......” (‘어머니3’ 중에서)

시간 앞에서 인간은 평등해진다고 하지만 동시에 불평등하기도 하다. 그렇게 지성으로 키운 자식이 이제는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려고 하나 어머니는 점점 ‘흙에 가까워지고 계시다’.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다니던 산지기 아내/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마루에 걸터앉아 먼산 바라보신다/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어머니5’)

홀로 마음의 밭을 일구시던 어머니도 고단한 옛날을 떠올리다 보면 문득 환한 보름달을 만나게도 되는가 보다.

“....../마실 갔다온 엄마가 말씀하신다/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실 갈 땐 둥실하던 보름달이/슬슬 줄어들어 그믐처럼 깜깜터니/돌아올 때 그짓말처럼 환하지 않더냐//그게 월식인 줄 대처 나간 성들은 알고 있었을까/얼음보다 더 찬, 멍석보다 더 큰 그믐달이/슬슬 가려주던 우리 집 언젠가/그짓말처럼 환해질 줄 알고 있었을까” (‘월식’ 중에서)

올 추석은 태풍으로 보름달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푸근한 어머니의 품과 넉넉한 누님의 웃음 속에 보름달은 숨어있지 않을까. 세상이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모처럼 찾은 고향에서 온 가족이 둥그렇게 모여앉아 송편을 빚으면 쓸쓸했던 마음의 뒷동산에도 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를 게다. 엄마야~ 누나야~~

(사진 = 영화 `가족` 스틸컷)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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