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야구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
독서, 야구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
  • 북데일리
  • 승인 2007.05.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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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큰길가 공원 분수에서는 천진한 꼬마들이 벌써 웃음과 물방울을 파편처럼 흘리기에 바쁘고, 앞집 강아지는 아까부터 혀를 반쯤 빼물고 새로 만들어진 하늘거리는 연록색 나무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장사들은 보나마나 신이 났을 테고, 반소매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시시각각 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여름이 거쿨지게 보폭을 넓히며 서둘러 오고 있나 봅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더워져 저도 반소매 옷을 찾아 입고 얼음 동동 띄운 커피도 한 잔 탔습니다.

여러분들은 책을 어떻게 골라 읽으세요? 책을 골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책관련 정보나 서평 등을 꼼꼼하게 살펴본 후 책을 고르는 분도 있으실 테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시는 분들도 계신가 하면,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책에 인용된 책을 따라가는 거미줄 식 독서를 하는 분도 계시겠죠. 저는 마지막,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거미줄식 독서를 즐기는 독자중 하나랍니다.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 작가노트에서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도서관은 미로와도 같아 책을 읽다가 인용된 어떤 책에 주목하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최종적인 책에 도달할 것만 같은 형이상학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데리다의 ‘의미의 산포’나 들뢰즈의 수평적 연결접속의 과정으로서의 소통인 ‘리좀’의 체험에 가까워진다고 말하지요.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 한 사람이 쓴 작품이지만, 작품 뒤에 무수히 많은 작가의 목소리가 숨겨져 있다고 느낄 때가 있으시죠? 이런 것 역시 작가의 거미줄식 독서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으며 바탕을 다진 후, 작가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쓰는 것이니 말이죠. 여기, 모리 오가이와 미시마 유키오, 토마스 만, 그리고 미르치아 엘리아데 등 거장들의 목소리를 켜켜이 숨기고 있는 젊지만 진중함을 갖춘 작가, 과연 누굴까요?

다들 예상하셨나요? 일본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입니다. <일식>(문학동네. 1999), <달>(문학동네. 1999), <장송>(문학동네. 2005). 역사 삼부작을 이미 접해 그를 알고 계신 분들이 많으실 테지요. <일식>, <달>, <장송>이 게이치로의 1기에 해당하는 소설이라면, 제가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작품은 게이치로의 2기 소설로 현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단편모음집 <센티멘털>(문학동네. 2006)입니다. 작년에 나왔으니 게이치로의 팬이시라면 진즉에 접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묶여 있습니다. ‘청수(淸水)’에서는 현대를 그리고 있지만 특유의 의고체 문장, 삶과 죽음, 정체성의 문제나 문명에 대한 작가의 철저한 사유를 엿볼 수 있고, ‘추억’은 해체된 시어를 독자 마음대로 조립하는 맛이 있습니다. ‘다카세가와’에서는 놀랄 만한 사실적 묘사와 사랑을 나누는 찰나의 존재론적 인식을 낚아내는 작가의 수확에 감탄하실 수 있습니다. ‘얼음덩어리’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으로 두 개의 단으로 나뉜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접점에 닿을 때마다 극적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게이치로의 실험적 형식은 ‘추억’과 ‘얼음덩어리’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추억’과 ‘얼음덩어리’는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단편입니다. 잘 기획된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추억’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어들을 낱낱이 흩뿌려 놓았습니다. 가볍지 않은 무게의 단어들을 음미하고 하나하나 주워가며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만들어놓은 장치를 발견하시고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얼음덩어리’는 꼭 세 번 읽어봐야 하는 소설입니다. 두 개의 단으로 나뉜 이야기를 각각 한 차례씩 읽고 나중에 둘을 비교해가며 읽었을 때 온전해지는 소설이거든요. 왼쪽 단의 소년 이야기를 먼저 읽든, 오른쪽 단의 여자 이야기를 먼저 읽든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형식의 파격도 파격이지만 여러분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곱씹어볼 수 있어 좋은 소설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현재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의 사건과 비교해 보면 그 사건이 왜 일어났나를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를 과거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재가 보인다는 것이죠. <일식>, <달>, <장송>의 역사 소설을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을 고민해보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일차적 의도였고, 이제 현대로 넘어와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 천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이 죽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종이를 열 번 떨어뜨렸을 때 그 모습이 매번 다르듯이 현대 사회 내의 미묘한 차이, 인간 내의 흔들림과 잡음 등이 중요한 현실이고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합니다.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이 어렵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독서 체험은 야구와 같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홈런을 쳐낸 것처럼 읽어서 단번에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책도 있고, 헛스윙처럼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 있는가하면, 몇 차례의 헛스윙 뒤에 쳐낸 홈런처럼 나중에 감동이 오는 경우도 있듯, 자신의 작품도 처음에는 읽기가 쉽지 않겠지만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작품을 써낸 것이므로 독자들이 홈런을 치길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홈런을 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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