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이름이 `개 같은 신념`인 까닭
시집 이름이 `개 같은 신념`인 까닭
  • 북데일리
  • 승인 2007.05.0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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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회사에 다닐 적 이야기다. 매일매일 겪어도 늘 사람을 지치게 하는 출근길에 시달렸다. 그중에도 몇 가지 낙을 찾아 푸석한 아침을 달래곤 했으니 한 가지는 뚝섬유원지역에서 청담역으로 넘어갈 때 차창 밖 한강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회사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있던 치킨집 개와 눈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 치킨집 개를 내 멋대로 ‘백구’라 불렀었다. 녀석의 눈은 빨갛고 다리 한쪽은 불편해 보였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 털은 옅은 잿빛이었다. 항상 묶여 있었던 백구. 거기서 거기인 반경만 맴도는 녀석에게서 나를 보았었다. 달리고 싶니? 나도 달리고 싶어. 우리는 아침마다 길 위에서 인사를 나누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 백구는 사라졌다.

시집 <개 같은 신념>(문학동네. 2005)을 읽으며 사라진 백구가 생각났다. 시들의 무대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제한적이다. 집, 거리, 버스, 지하철, 술집 따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끽해야 산골 민박집 같은 곳으로 이동할 뿐이니 짐작이 가지 않는가.

화자의 행동양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는다. 빨래를 돌리고서 잠을 잔다. 그러다 술과 시 앞에서 깊은 숨을 토한다. 참으로 닮았다. 아스팔트 위에 축 늘어져 있다가 이따금 바람의 뒤태를 향해 왕왕 짖었던 백구를.

내면이건 일상이건 거르지 않고 남김없이 보여준 탓일까. 시인의 삶은 속상하리만치 누추하고 지지부레하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하는 가장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시 쓰는 일은 밥벌이가 되지 못하고, 때문에 그는 생활인의 위치에서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시인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에게 시란 남몰래 불태우는 연정이요,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수다. 하지만 그의 가족에게는 생활에 대한 불륜 혹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길바닥을 떠도는 주정일 뿐이다.

그 진저리나는 간극을 지켜보며 시인이 애써 지켜온 것이 결국 이런 시들일까 하는 생각에 아연해진다. 나아가 시인이 회자하는 진짜 시는 따로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일상과 완벽히 격리된 아름다운 언어의 비망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마저 품게 되는 것이다.

아내여, 내가 젖는다고 세상이 바뀔까

사랑도 죽음만큼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미수 사건 후 집에서 키우는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가

아내의 품속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내가 불러도 녀석들은 오지 않는다

개들이 진실의 냄새에 더 민감한 것이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코와 입에서

연기를 내뿜던 나를 녀석들은 차갑게 외면했다

그건 개들의 신념이다 본능이다

사랑의 기압골이 맞부딪쳐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아내는 지금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다

아내여, 지금 맞고 있는 물줄기가 사랑임을 왜 모르는가

물 위에 쓰는 것이 사랑인 것을

내가 젖지 않는 이유는 내가 이미 젖어 있기 때문임을

개들의 신념보다 나의 신념이 때로는 진보일 수 있는 게다

그러므로 나는 뉘우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실토하지 않을 참이다

아이들도 못난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오겠지

사랑도 죽음과 같아서 리허설이 없다는 것을 -「개 같은 신념」 중에서

그러나 나의 의심이란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분명 시인에게는 남기고 싶고 노래하고 싶은 삶일진대. 예행연습 없이 무대에 올리고, 그럼으로써 더욱 뜨겁게 보여주는 작품일진대. 그 남루함과 위태로움이 실은 한 인간과 한 가정과 문단의 한 귀퉁이를 이어주는 희망인데 말이다.

내게도 신념이 되었던 ‘개’가 있다. 이제 막 정거장을 떠나려 하는 버스나 9시까지 찍어야 하는 출근 카드보다 더 믿게 된 녀석이었다. 한때 내 일상의 지렛대가 되어준 존재는 그렇게 예고도 없이, 선명한 색도 달콤한 향기도 없이, 칙칙하게 그러나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 백구는 사라졌지만 그 녀석의 노래는 남아 있다. 어쩌다 귓가에 ‘왕’하는 소리가 울릴 때면 이게 무얼까 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그것이 ‘개 같은 신념’이었다는 걸.

[고은경 시민기자 rad83@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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