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몸부림치거나, 매혹당하거나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매혹당하거나
  • 북데일리
  • 승인 2007.05.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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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프랑스어 ‘jalousie’에서 왔습니다. 프랑스어 ‘jalousie’는 라틴어 ‘zelosus’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열정과 따뜻함, 열성 또는 강한 욕망이죠. 그런데 프랑스어 ‘jalousie’에는 질투라는 외에 수평 조각들이 연결된 베네치아 블라인드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의 부정한 행위를 잡을 수 있을까 해서 블라인드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비롯되었을 거란 얘기지요.

흔히 질투와 ‘시기’의 의미를 혼동하여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투는 ‘시기’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시기’가 가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우월함에 대해 불쾌함과 악의를 느끼는 것이라면, 질투는 이미 자신이 가진 소중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매번 볼 때마다 어떻게 비정상적인 상태가 가져오는 비이성적인 마음에서 저렇게 이성적이고 비유적인 대사가 사태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한 거장의 드라마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한 여자는 ‘시기’하고 한 여자는 ‘질투’를 느끼는 것인가요?

여기, 위에서 설명해 드린 내용과 꼭 들어맞는 소설이 있어 여러분 앞에 놓아드립니다. 바로 누보 로망(Nouveau Roman:신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La Jalousie)>(민음사. 2003)라는 책입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특별히 귀애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이미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느끼며 읽어보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소개해드릴 이 소설 <질투>는 사실, 읽기가 그리 쉬운 책은 아닙니다. 읽는 이에 따라 반응이 천양지차거든요. 넘어가지 않는 책장에 몇 번을 덮어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읽으셨다는 분도 있는가 하면, 작가의 대단함을 몸으로 느끼며 흥미롭게 읽으셨다는 분도 계시니까 말이죠. 뭐, 누보로망에 대한 작가의 생각처럼 단일한 반응이 아니라,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공존하는 것과 독자를 불편하게 하여 깨어있게 하려는 의도까지 모두 성공하였으니 확실히 로브그리예를 대단한 작가라 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줄거리지만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내의 행동에 질투(La Jalousie)를 느낀 남편이 블라인드(La Jalousie) 너머로 몰래 아내를 감시하고, 행동을 기록한 것이 이야기의 다입니다.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철저히 화자인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 기록한 아내의 행동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력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로브그리예는 남편을 ‘나’로 언급하지 않은데다가 이름도 얼굴도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로브그리예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만들어낸 것이죠.

또한, 작가는 <질투>를 철저히 영상적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새로운 서사를 추구했던 로브그리예는 서사의 모든 요소들, 이를테면, 순차적인 전개, 연속적인 플롯, 하나의 큰 점을 향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 등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물과 현상만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 이야기도 어떠한 심리묘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도 ‘사물’로 그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영화처럼 항상 현재형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다른 능력에 비해 공간 지각력이 약하긴 하지만, 이 책에서 기하학적으로 묘사된 부분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미지로 와 닿는 것과는 달리, 정확한 수치가 객관성을 주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주관에 치우쳐 있다고 느껴 흥미로웠거든요. 로브그리예는 지엽적이고 사건의 서술에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없는 사소한 일들을 장황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독자와 소설을 의도적으로 이화(異化)시켜 관찰자의 입장으로 손잡아 이끕니다.

소설 <질투>는 빛의 스펙트럼 같은 소설입니다. 과학적인 층위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주고 여타 포스트모던 소설들보다 훨씬 분산된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슷한 듯 반복되는 기하학적 묘사에 몸서리를 치고 계시다면, 잠시 숨을 돌려 먼 산을 한 번 보시고, 질투로 인해 블라인드 너머에서 배우자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이 되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소설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삶은 불안정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것도 정답은 없지만, 문학으로 사람을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과 사실성이 담보되지 않은 모호하고 다층적인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 독자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역시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로브그리예의 작품을 대하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의 책을 절반은 읽으신 겁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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