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참사를 보며 떠오른 소설
버지니아 참사를 보며 떠오른 소설
  • 북데일리
  • 승인 2007.04.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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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지난 주,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버지니아 참사로 인해 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생명들, 좋은 곳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길 빕니다. 아무도 손잡아주지 않아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범인의 모습 또한 내내 눈에 밟히네요. 한 사람으로 인해 치른 대가가 너무 커 아직은 용서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저에게도 죄를 넘어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이 곧 생길 수 있길 바랍니다.

매체는 집요한 파리 떼들처럼 앞발을 비비며 달려들었습니다. 뉴스는 온통 지난 주 일어났던 버지니아 참사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난사 사건을, 범인이 한국인 1.5세라는 사실에 경악과 수치를 금치 못하면서 온 국민이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것처럼 떠들어댔지요.

그리고 며칠 뒤 공개된 범인의 분노로 범벅이 된 동영상과 섬뜩한 사진들은 모자이크 처리도 되어있지 않더군요. 그리고, 누이의 실명까지 밝혀 보도하고, 한국에서 15년 전 살았던 동네와 초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뒤져 보여주는 등 몇몇 방송사나 신문들은 발군의 근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더군요. 어떻게든 기사를 내야하는 방송국이나 신문사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하기 때문에 작은 연관성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무리하게 과거의 조각들을 모으고, 상처를 후벼 파고 도려내는 것을 보는 일은 당사자가 아닌데도 참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상처가 회복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더 잘 아실 터, 성숙하지 못한 대응이 아쉬웠습니다.

이번 참사를 보면서 문득 김경욱의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버지니아 참사를 보면서 김경욱의 말라 바스러질 것 같은 문장이 생각났던 건 생각해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김경욱이 그리는 인물들은 나사 몇 개가 빠져 있고 이음매가 제대로 들어맞지도 않는 싸구려 옷걸이를 조립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애처롭거든요.

소통의 삐걱댐, 혹은 부재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게토(ghetto:예전에, 유대 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 또는 미국에서, 흑인 또는 소수 민족이 사는 빈민가를 이름)에 거주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니까 말이죠.

조승희 역시 자신의 게토에서 세상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이자 해방구는 대중문화뿐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김경욱은 퍼렇게 벼린 날로 현실의 단면을 저며 보여주는 ‘시의성(時宜性) ’을 갖춘 훌륭한 소설가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 앞에 놓아드릴 소설은 단편집으로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 2005)입니다. TV문학관에서 방영했던 사실도 있고, 장국영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을 테니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 여러분 앞에 소개해 드립니다.

김경욱의 소설을 읽다보면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씽크로율 수치가 높아지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70년대 생이라면 더욱 농밀한 연대감마저 느껴지실 겁니다.

앞 세대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면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세대도 아닌 그야말로 어중간한 세대였지만, 미디어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변화를 가장 빨리, 그리고 먼저 체험할 수 있었던 세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행운일까요?

김경욱은 ‘세상은 끊임없이 읽고 풀어내야 하는 거대한 텍스트이고, 대중문화는 이를 해석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읽다보면 김경욱의 소설은 문화를 소비하는 우리네 삶에 더욱 가깝게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국영이나 커트 코베인, 접속과 채팅, 플래시몹, 스타크래프트 등은 대중문화의 한 부분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우리네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요.

소설 안의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향유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곳 어디에도 지속적인 소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향유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 혹은 ‘기호’의 확대 재생산일 뿐, 필요 이상의 관계는 단호히 거부하는 일방통행길입니다. 때론 무언가를 꽉 채운 안이 보이지 않는 검은 비닐봉지처럼 금방이라도 늘어나 찢어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삶에 대한 자각이나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나마 덜 가엾게 느껴질 텐데 이들의 자각은 미미하고 아령칙한 정도에 그쳐 마뜩한 대응방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종일관 강팍하고 메말라있다는 느낌이 들고 햄버거의 맨빵을 씹듯 목이 막히고 목 안이 깔깔합니다.

돌아보면, 늘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얘기를 하기에만 급급한 우리네들의 삶은 급기야 ‘소통하는 방법과 진정한 소통의 의미’에 대한 강좌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김경욱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소통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서사라 일독을 권합니다.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침묵에 익숙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혼자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것을 꺼립니다. 혹시 모를 소통에 대비하여 핸드폰을 꼭 지니고 다니고,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등 잠시라도 침묵이 주는 두려움이 싫어 벗어나고자 합니다. 본의 아니게 침묵 속에 갇혀있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전신을 옥죄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될 수밖에 없겠죠.

하도 들리는 소식이 흉흉하여 자글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살아볼수록 건강한 정신을 건사하며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극단적으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을 무조건 힐난하기 보다는, 미리 주위를 돌아보고 그러한 사람들의 절박한 도움 요청을 알 수 있어 그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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