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기간제 아내'라고?
직업이 '기간제 아내'라고?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7.16 2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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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의 <트렁크>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너를 봤어>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놀라운 흡입력을 불어온 김려령이 이번엔 결혼 제도에 대해 말한다. 『트렁크』(창비. 2015)는 기간제 아내라는 독특한 설정이다.

 스물아홉 살 인지는 결혼정보업체의 비밀 부서 NM(NEW MARRIAGE)에서 기간제 아내 FW(FIELD WIFE)다. 고객과 일정 기간 진짜 부부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결혼생활 중 불미스러운 일(폭언, 폭력, 비이성적 행동)이 있으면 회사에서 조치한다. 한 번의 결혼이 끝나면 인지에겐 14K 실반지와 트렁크만 남는다.

 취직이 어려운 시기라지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지의 동료를 보면 알 수 있듯 누군가는 돈 때문에 누군가는 거주할 집 때문에 선택한다. 인지처럼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기간 장기 출장이라는 이유로 집을 떠날 수 있는 이유도 있었다. 남자 때문에 어머니와의 갈등도 포함된다. 인지가 사랑한 남자는 어떤 남자였을까?

  ‘모래밭에 푹푹 빠지더라고 원하는 방향으로 걷고 싶은 만큼만 걸을 순 없을까. NM은 허위를 감춘 사막이고, NM 밖은 허위로 포장된 사막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세상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세상을 알아버리는 것이었다.’ (69쪽)

 젊은 층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한 5포 세대라고 한다. 인지도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결혼은 포기했고 친구도 시정뿐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은 말할 수 없다. 한 번의 결혼이 끝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결혼을 한다. 인지는 다섯 번 째. 놀랍게도 다섯 째 남편은 전 남편이었다. 두 번이나 자신을 선택한 회원이라니.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남편을 보게 되지만 계약일 뿐이다. 다른 공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결혼 출장은 나쁘지 않았다.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인지에 비해 시정은 무척 평범하다.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 언제나 인지 곁을 지킨다. 고교시절 삼총사였던 혜영의 죽음 이후로 시정에겐 인지밖에 없다. 시정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인지를 향한 사랑이다. 시정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지는 담담한 듯 고백을 듣지만 시정의 사랑 때문에 혜영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혜영은 시정을 사랑했고 시정은 인지를 사랑했다. 시정과 혜영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을 걸고 있었다.

 ‘그동안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시간이 좀 더 흘러야 할 것 같다. 후회되는 삶이 모두 잘못 산 건 아닐 테니까.’ ​(206쪽)

 20~30대를 대표하는 인지와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기간제 아내와 결혼 출장이라는 소재로는 기발하고 산뜻하지만 기괴망측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돈의 권력 아래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결혼 제도와 의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지는 소설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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