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언어의 싹을 틔워야 할 운명'
한창훈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언어의 싹을 틔워야 할 운명'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7.13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소설이든 삶이든 궁리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대상이 아니던가.’ (165쪽)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고유서가. 2015)는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삶에 대한 책이다. 그가 사랑하는 바다, 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그것과 하나 되어 살아온 삶으로 고독과 결핍을 아는 사람이기에 말이다. 그 안에 글이 소설이 있고 문학이 포함될 뿐이다.

 ‘반쯤 가라앉아 가는 배. 돌에 눌린 배추씨앗처럼,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언어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창작하는 이들과 닮았다. 노질을 하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바닷가에 닿을 것이고 그러는 사이 배는 낡아진다. 결핍과 상처를 창작의 질료로 삼으라는 말은 맨 처음 누가 했을까.’ (106쪽)

 파도를 이불 삼은 선원, 건설현장 잡부, 수산물 가공 현장, 살아온 삶의 이력이 말해주듯 한창훈의 문장엔 생명력이 넘친다. 어쩌면 노동을 동반한 생명력이 한창훈 문장의 시원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섬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를 누군가의 남편을 데려가 버린 바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을 바꾸는 바다에서 삶을 길어 올린다. 그것은 생활이자 소설이다. 한창훈이 쓰는 소설은 언제나 바다를 품었고 인물들이 고단한 이유다.

 아는 것을 쓰는 것과 안다고 믿는 것을 쓰는 것은 다르다. 한창훈이 쓰는 글은 전자이다. 제대로 문학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온 그의 치열한 삶이 있어 가능했다.

 글이 그렇듯 인간 한창훈도 다르지 않다. 가족과 지인, 문단의 동료에 대한 글에서 그들을 격하게 아끼고 있다는 게 보인다. 시인 안현미를 위한 만세는 마치 행복을 부르는 주문과도 같다.

 ‘안현미처럼 사는 인생, 만세다. ‘만세’는 압박과 불편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노래하는 단어이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앞으로는 더 잘 될 거라고 예측할 때도 쓴다. 뭐 당장 그렇게 안 돼도 상관없다. 만세를 또 부르면 되니까. 자꾸 만세 부르다 보면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웃음소리가 정말로 행복하게 들리게 될 것이다.’ (262쪽)

 한창훈은 바다에서 삶을 쓰는 작가다. 그와 바다는 한 몸이다. 문장에서 파도 소리가 나는 건 착각이 아니다. 바다의 계절 여름에 그의 문장으로 더위를 날려도 좋겠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