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작가 '막돼먹은 나를 불행에서 건진 건 박수근'
박완서작가 '막돼먹은 나를 불행에서 건진 건 박수근'
  • 정지은 기자
  • 승인 2015.06.2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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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막돼먹은 (박)완서씨'를 구경하는 느낌이 쏠쏠하다.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이 쓴 '박수근 아내의 일기'(현실문화)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특별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박 작가는 박수근 화백의 모습을 회상하며 싹수머리 없었던 20대 때 자신의 모습을 까발렸다. 그 적나라함이 오히려 대인배스럽기까지하다.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이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만큼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돼먹지 않은 영어로 미군에게 수작을 걸 수 있게 되고, 차츰 그림주문도 늘어날 무렵부터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하게 했다. 그들은 거의 사십대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는 어른인데도 나는 그들을 김 씨, 이씨 하고, 마치 부리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마구 불러댔다. 김 선생님, 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싫었으면 김 씨 아저씨, 이씨 아저씨 라고 해도 좋으련만 꼬박꼬박 김씨, 이씨였다. 그(박수근)도 물론 박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양갓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쟁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 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초상화부는 그림주문 반품받는 것을 ‘빠꾸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기분이 언짢으면 함부로 빠꾸받는다는 걸 알고 내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을 깔보고 한 껏 신경질은 부렸다. 나는 하찮은 그들을 위해 나의 그 대단한 자존심을 팔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색을 내도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싹수머리 없이 못되게 굴었나를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틈만 있으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 김 씨 사진 좀 똑바로 보고 그려요. 원 눈을 감고 그리나. 발가락으로 그리나….. 이렇게 그려놓고도 빠꾸받으면 내 탓처럼 굴겠지.” 이런 식이었다. 영락없이 아무런 애정 없이 지진아를 따로 지도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행세했다.

어느 날 그가 그의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가 될 줄 아남?’ 하고 비웃었다.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니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 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박수근- 일하는 여인 1936 제 15회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지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에 입선한 그림이라고했다. 당시 나는 일제시대의 관전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잘난 척이라곤 모르고 간판쟁이들 중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하고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졌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을킨 내 심정을 축여오는 듯했다. 비로소 내가 막되어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참 시선으로 지켜보아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박수근 아내의 일기' 박완서 작가의 회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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