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미군 PX에서 박수근과의 첫만남
박완서, 미군 PX에서 박수근과의 첫만남
  • 정지은 기자
  • 승인 2015.06.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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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고 박완서 작가와 고 박수근 화백의 인연이 깊다. 소설 '나목'(박완서 저)에서도 등장하듯 두 사람은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다. 박수근 화백의 아내 김복순 저자가 쓴 '박수근 아내의 일기'(현실문화)에서는 박완서 작가가 그와 첫 대면의 순간을 회고하며 쓴 글이 눈길을 끈다.

"박수근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 가는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였다. 그때만 해도 서울대에 여학생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고, 특히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긍심이 대단할 때라 나도 내 위에 누가 있으랴 싶게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고 집안이 몰락해서 어린 조카들고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학업을 계속할 가망은커녕 입에 풀칠할 방도도 나에겐 난감하기만 했다. 서울의 번화가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때 나는 오빠 친구로부터 미8군 PX 내 임대상가 점원직을 소개받았다.

그무렵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대의 큰 건물들이 다 불타고 오직 그 건물만이 온전했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우리가 밖에서 보기에 PX야 말로 별세계였다.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진기한 보물이 널려 있는 '꿈의 보고'였다. 나는 가망없는 줄 알면서도 그에게 나의 곤경을 부끄럼없이 털어놓고 취직을 부탁했다.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요란한 수를 놓는 가운이나 파자마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한 달도 안돼 같은 업주가 경영하는 초상화부로 가게 되었다. 초상화부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업주는 그들을 훗두루 간판쟁이들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 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딴 간판쟁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비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나는 화가를 뒷바라지 하면서 미군으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맡는 일이었다. 제 발로 걸어와서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주문하는 미군은 거의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초상화를 그리도록 꾀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그 일은 물건을 파는 일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영어도 짧은 데다가 꽁하고 교만한 성격도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식구가 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만두어버릴까 보다고 매일 아침 벼를 정도였다.

나에게 전혀 맞지 않은 일이어서 그림주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업주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화가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제였지만 글은 작업량에 따라 일주일에 한번씩 그림삯을 타가게 되어 있었다. 내 식구뿐 아니라 화가들 식구의 밥줄까지 달려 있다는 무서운 책임감이 조금씩 내 말문을 열게 했다.

화가들이 다들 나에게 불평을 할 때도 그는 거기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 '박수근 아내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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