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되고 싶은 시인 `삼천갑자 복사빛`
나무가 되고 싶은 시인 `삼천갑자 복사빛`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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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수환모 거북이와 두루미 사치기사치기 사뽀뽕 지기지기 지기뽕~~”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아들의 장수를 빌면서 이름을 길게 짓는 장면입니다. 결국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그 이름을 끝까지 부르느라 자식을 잃는다는 해학적인 내용이지요. 자식의 장수를 비는 마음을 오늘날에는 이해가 안가겠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신생아의 생존율이 아주 낮았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도 6남 3녀를 두었는데 살아남은 자식은 2남 1녀뿐이었습니다. 아무튼 저 우스운 이름에도 ‘삼천갑자 동방삭’이 나오는데, `삽천갑자 복사빛`(2005. 민음사)을 들고 만백성의 장수를 비는 정끝별 시인을 만나봅니다.

지상의 생명체 중에서 그 수명이 긴 것 중 하나가 나무입니다. 시인도 ‘소금호수’에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고 했는데, 바오밥나무(사진)의 수령이 길게는 5천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럼 시인은 어떤 나무가 되고 싶은 것까요. 시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 봅시다. 봄입니다.

“쭉쭉 뻗은 봄 솔숲 발치에 앉아/소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저 높은 허공에/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한줄기에서 난/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서로가 덫인 채/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중에서)

아직 죽음을 보내지 못한 삶과, 그 삶과 죽음이 잠시 함께하는 시간이 가슴 아프게 저며옵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인데 저런 슬픔을 이고 있어야 하다니..., 빨리 여름으로 가야겠습니다.

“누가 너를 부러뜨렸을까/꺾인 자두 가지의 두 몸이 삐걱, 삐걱/질긴 가지 껍질에 오래 매달려 있다//....../부러진 자두 가지의 몸이 툭, 툭/살아 있는 자두 가지의 몸에 부딪힌다/비야 바람아, 내가 매달린 이 가지 끝을/마저 분질러다오!” (‘이 자두 가지 끝을’중에서)

이게 웬일입니까. 슬픔이 깊으면 ‘마음의 가지’들도 번거로워지나 봅니다. 비바람이 불어와 이 모든 고통을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 합니다 그려. 가을이 되면 좀 차분해질까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인에게 나무의 가을은 없고 바로 겨울로 이어집니다. 썰렁해지는군요.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무엇이 터졌을까/명치 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길가에 벌처럼 선 자작나무/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뼈만 솟은 서릿몸/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숯덩이가 된 폐가 하나 품고 있다” (‘자작나무 내 인생’)

아하, 드디어 시인이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길가에 벌처럼 서서 가슴에 멍을 안고, 숯덩이가 되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었던 것이군요. 그래서 시인은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사시다가 일년전 나무곁으로 돌아가신 김장수 선생님을 추억합니다.

“오십 년째 이름 없이 살던 참나무 한 그루/오늘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 되셨다/임학계 거목 김장수 씨 화장 유골이/살아 아끼시던 이 참나무 아래 묻혔으니/나무와 함께 살다 나무 곁으로 가셨으니/....../나도 죽어 자작, 나무 되어/별을 먹은 나무 되고 싶다//불힘 좋은 몸들,/나무들의 향기가 낯익다” (‘또 하나의 나무’중에서)

하여 시인도 한그루 나무가 되어 금세 스러질 삶에 삼천갑자 사랑의 빛을 보여 주는군요.

“내리고 내리고 내리면/저리 무덕무덕 쌓이는 걸까/쌓이고 쌓이고 쌓이면/저리 비릿하게 피어나는 걸까/지고 지고 다시 지면/저리 적막히 물살 지는 걸까//겨울 동산에서 봄 동산까지/등에 지고 갔던/삼천갑자 동방삭이 복사빛 사랑이/저리 하얗게//세상 흰빛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사라지는 누구의 어깨일까”(‘먼 눈’)

하얀 옷을 입고 봄에서 겨울까지 살랑살랑 걸어가는 저 여인에게서, 누가 복숭아를 훔쳐 십팔만 년의 삶을 얻을 것인가. 삼천갑자 사랑의 내공을 얻을 자 누구인가.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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