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존재 사이를 헤매다
기억과 존재 사이를 헤매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6.0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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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가즈오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민음사. 2015)는 기억에 관한 책이다. 아니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화자 크리스토퍼는 열 살 때 상하이를 떠나 런던의 이모집으로 왔다. 누구도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실종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사실상 존재의 근원인 부모님의 부재는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고 그로 인해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열 살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크리스토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상하이의 풍경과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불투명한 이미지다. 그럼에도 친구 아키라와 함께 했던 어떤 날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하다.

 부모님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을까. 영국에서 크리스토퍼의 삶은 탐정과 닿아 있었다. 누구와도 내밀한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 채 그의 모든 신경은 상하이로 이어졌다. 친구들과 지인들이 흠모하는 사교계에서도 유독 세라에게 마음이 쓰였던 건 그녀에게서 결핍을 보았기 때문이다. 탐정으로 성공한 후 보호막이 사라진 고아 소녀 제니퍼를 입양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상하이를 지울 순 없었다. 전쟁으로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지만 부모님을 찾아야만 했다. 이미 부모님의 실종에 관련된 많은 정보와 증인이 있었다. 부모님의 소식을 접한 순간 크리스토퍼는 남편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한 세라에게 떠나자는 제안을 받는다.

 “이제는 다른 어떤 것, 따뜻하고 나를 보호해 주는 것,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해요. 내일의 하늘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을요.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조만간 너무 늦게 될 거예요. 너무 고정되어서 변하지 못할 거예요.” (299쪽)

 어떤 면에서 세라의 제안은 옳았다. 영국인은 상하이 사람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상하이는 불안한 곳이었다. 크리스토퍼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부모님의 신변을 확인하고 세라에게 가면 된다고 믿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놀라운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 그 자신감 덕분에 아키라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일까. 손에 닿는 죽음과 마주하는 상황이기에 크리스토퍼와 아키라의 추억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은 애절하고 애절하다.

 “중요한 일이야.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지. 아주 중요하지.” (370~371쪽)

 크리스토퍼와는 다른 의미겠지만 우리의 생은 고아로 집결되는지도 모른다. 저마다 시기만 다를 뿐 결국 혼자 남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혼자와 혼자가 만나 우리를 만들고 함께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불완전한 기억이 아닌 완전한 기억을 채울 수 있다고 말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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