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음의 다른 얼굴...
삶은 죽음의 다른 얼굴...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06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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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장편소설 <끝의 시작>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는 주인공을 상상한다. 그러나 소설은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영무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암 말기 환자지만 빨간 립스틱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무는 그런 어머니 곁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이 두렵다. 아내 여진과의 거리도 좁혀지지 않고 결국 이혼이 거론된다. 어머니 때문에 미뤄졌을 뿐 이혼은 예정된 수순이다.

 영무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온 아내였지만 변하지 않는 남편에게 멀어진다. 아이가 유산되자 여진은 잡지사를 그만두고 충동적으로 미용실을 인수한다. 둘 사이의 간극은 커졌고 여진에게는 동현이라는 젊은 애인이 생긴다. 여진은 잘못된 관계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문밖의 노크 소리에 응답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이 보내는 시간을 생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충만하게 즐기는 것,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사랑 없이 건조하고 퍽퍽하게 사는 것보다 뜨겁고 충만하게 사는 것, 그게 지금 여진이 바라는 삶의 방식이었다.’ (89쪽)

  영무에겐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자살한 아버지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있었다. 야반도주를 하듯 이사를 한 어머니는 언제나 환한 햇볕 같았다. 하지만 영무는 언제나 우울했고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도 쉽게 끝났다. 영무에게 드리워진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무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영무에게 삶은 죽음의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영무는 자신의 삶이나 하루가 묘지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일 자체의 유사성과 상관없이 태도나 심정이 그랬다. 이른 아침 황량한 공동묘지에 가서 밤새 쌓인 쓰레기와 낙엽을 치우고 상석 위도 쓸어 낸다. 하루 종일 기다란 빗자루를 든 채 묘지 안을 유령처럼 맴돈다. 묘지 안에서도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자리와 묘비, 상석의 크기와 재질로 구별된다. 그러나 부질없고 쓸쓸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07쪽)

  그런 영무를 통해 소정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집을 나간 동생과 바닥난 잔고가 모두 아버지로 비롯된 것만 같았다. 그나마 소정이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우유니 사막과 남자 친구 진수와 꿈꾸는 막연한 미래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소정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진수는 걱정과 근심을 모르고 살아왔다. 사랑했지만 이별을 택해야 하는 이유다.

  평범한 삶의 이야기로 소설 속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친근한 일상처럼 가까이 파고든 암 환자, 권태로운 부부 관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바쁜 취업 준비생의 모습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위태로운 일탈을 꿈꾸는 대신 주어진 현실을 살아내고 그 안에서 웃음의 조각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들의 애쓰는 모양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운 건 왜 일까.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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