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에 33회전, 낡고 오래된 레코드 이야기
1분에 33회전, 낡고 오래된 레코드 이야기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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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특히 20대나 30대 초반의 청춘들은 내 얼굴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나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고, 매혹시킨 음악이 있다고."

어느날 레코드가 자신의 생애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면 이렇게 먼저 항변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로 레코드가 쓴 자서전이 나왔다.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가 쓴 소설 `33과 3 : 레코드의 자서전`(2003. 작가정신)은 어느 낡고 오래된 레코드가 들려주는 블루스 같은 추억담이다.

그가 말문이 트인 건 33년 전 소년시절 자신을 샀던 주인이 중년이 되어 15년만에 골방에서 먼지를 털고 빠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1970년 한 소년이 좋아서 `거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처음으로 산 레코드였다. 1분에 33회전, 정확히는 33과 1/3번 회전하는 LP다.

그는 소년이 자신을 듣고 또 들으며 어른으로 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랑했던 시절과 버림받았던 시절 그리고 장롱 속 잡동사니 속에서 보낸 15년 세월, 레코드 아니 그의 나이는 33살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60, 70년대 레코드 재킷 전시회에 출품하게 된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 팝 레코드 그래픽`이라는 전시회에서 그는 옛 동료들과 눈물겨운 해후를 한다. 거기서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을 만난다. 닐 영의 흐느끼는 목소리, 밥 딜런의 허스키 음색, 믹 재거의 목쉰 외침 등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다른 전시회는 이것보다 더 체계적이었어"라고 말하는 거만한 비틀스도 만난다. `록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곡 중 하나`인 `타임`을 기억나게 한 핑크 플로이드는 역시 지금도 가슴을 뒤흔든다.

또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믹 재거, 우울한 음색의 레너드 코헨이나 자유분방한 레드 제플린과도 오랜만에 해후한다. 그 외에 퀸, 딥 퍼플, 롤링 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부르스 스프링스턴의 추억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작고 깨지지 않는 콤팩트 디스크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 같은 LP들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음을 절감한다.

영구전시의 꿈이 사라진 채 전시회가 끝나자 레코드는 좀 쓸쓸하다. 존 레넌이나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 그렇다. 레코드들이 마지막 밤 절망 속에서 불렀던 노래는 국가도 종교도 천국도 지옥도 없는 세계를 노래한 존 레넌의 `이매진`이다.

그래, 추억을 쓸쓸한 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동료 음반들과의 수많은 추억들을 회상하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음악은 사회였고 이념이었고 혁명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까마득하다.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앞에선 화자인 LP는 이제 전시품에 불과하다. 장년이 된 주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 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그도 변했다. 잔소리하던 어른들을 싫어하더니 10대 아들에게 똑같이 구는 꼴이란!

한권의 책이 태어나서 사라지기까지의 운명을 그린 `책의 자서전`(2003. 열대림)을 통해 우리나라에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작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이 작품은 역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의 자서전`을 발표하였다고 하니 그가 쓰는 `추억`들의 자서전은 앞으로 계속될 것 같다.

아, 참 한국에서 LP, 1분에 33회전하는 레코드를 듣고 싶으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다. 홍대앞 주차장 거리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가면 아직도 추억 속의 앨범들과 맘껏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존 바에즈와 밥 딜런. 그림 = 롤링 스톤즈, MattGentry 제공 재팬엔조이 www.japanenjoy.com)[북데일리 박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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