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림 시인의<버들치>
[북데일리] 등단 후 20여 년 동안 삶과 말에 천착해온 시인이 시집 <버들치> (문학동네.2014)에 말이 시가 되는 절정을 보여준다. 시인의 삶 속에 들어온 고향 사람들, 살아오면서 만나온 사람들의 삶을 말하며 그 안에 지탱하는 말의 힘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고흐가 그려준 우체부 룰랭의 얼굴은 진흙빛이다/ 올리브 색깔의 구겨진 제복을 입은 룰랭은/ 아를르의 포도밭 둑길을 늙고 지친 노새처럼 돌아단니다/(중략)//룰랭과 김판술씨의 좁은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멍에 같기도 하고 핸들 같기도 하다/ 경사진 시골길에서 곧 쓰러질 듯 비뚤비뚤거리지만 좌우로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 나아갈 줄 안다. 비바람 맞으며 무르익은 나이가 중심이다."(우체부 김판술) 부분
시인은 특이하게도 명화속에 시를 끌어들인다. 고호 고갱, 마티스 렘브란트의 그림들이다. <감자먹는 사람들>,<밀짚모자를 쓴 남자>,<사이프러스>,<렘브란트의 어둠>등 그림의 명암을 통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그에게 예술은 곧 삶이다. '삶이 궁핍할수록 생존의 몸짓'은 더 치열하다.
"대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벚꽃이 너무 눈부셔 쓸쓸한 봄날/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봄날이 삽날에 잘린 지렁이처럼 그렇게 말라비틀어지며 기어서 간다/ 길이 보이지 않는 가슴 속에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서둘러서 간다/ 천지사방을 할퀴며 간다/ 그녀의 봄은 칼날을 품고 있다 때론/ 아플 정도로 황량해서 아름다운 生도 있다"(봄날2)전문
꽃이 지천인 봄날 시인의 눈에 비친 그녀의 삶은 누추하다. 가난과 죽음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에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혜원은 그의 "서정시야말로 삶의 상처와 비애에 공감하면서도 치유와 각성의 언어를 실현할 수 있는 저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을 "말에 붙잡혀 사는 자"라고 한다. 다음 시를 보자.
"어떤 말은 생쌀같이 씹히고 어떤 말은 밥그릇 속에 든 머리카락 같다/ 어떤 말은 입가에 묻은 밥알 같고 어떤 말은 눈에 들어간 모래알 같다/ 애써 생쌀을 씹게 하고, 머리카락을 밥그릇에 집어 넣게 하고/ 모래알이 눈 속에 들어가게 도드라지는 말들이 있다/종종 핏발 서본 사람은 일부러 모래알을 집어 넣지 않는/ 생살을 씹어본 사람은 내켜 생쌀을 먹지 않는다/(중략)//밥알을 밥그릇에 들어가게 하는 말들을 뒤엎고자 마구잡이 칼을 휘두르는 컴컴한 말들/ 패배한 말들을 뒤엎고자 마구잡이 칼을 휘두르는 컴컴한 말들/ 패배란 말의 머리통을 밟고 선 점령군 같은 말/ 빼앗은 밥그릇을 치켜들고 히히덕거리고 있다/ 깊고 어두운 거리에서 솟아난 말들이 거리거리에서 쫘악 깔렸다/ 비릿한 냄새가 흥건하다."(비릿한)부분
소설의 힘이 이야기라면 시는 언어를 끌고 가는 힘이 아닐까. 시집에는 말에 관한 실감나는 비유의 시들을 볼 수 있다. 사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늘 말과 씨름하는 시인의 언어는 삶을 밀고 가게 한다.
속이 텅빈 말의 배를 눌러/ 시를 게워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물의 껍질에서 끝없이 미끄러지고 마는 말로/ 시를 주물럭거리고 싶지는 않다/ 염통이 팔딱팔딱거리는 말로/ 구멍투성이 말랑말랑한 말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말로/ 참꽃 같은 시를 낳고 싶다/ 참말로 먹을 수 있는 시를."(참꽃 같은> 전문
몸 안에 있던 말들이 몸 밖으로 나와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 생채기를 내는 말들을 시인은 세상언어로 가공하여 삶을 살게 한다. 그가 말에 붙잡혀 사는 이유이며 '참꽃 같은 좋은 시를 짓기 위함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심정으로 시를 써 보라'라는 아내의 말처럼 시인은 이미 '마음 속 주렁주렁 달린 빈 주머니'에 말랑말랑한 시를 채워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은 시인에게 말이 어떤 존재이며 말의 힘, 말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장맹순 시민기자>
저작권자 © 화이트페이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