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서 더 보고픈 책
사라져서 더 보고픈 책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5.2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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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매혹...<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북데일리] “우리는 왜 사라진 예술작품에 매혹되는가? 가치 높은 예술작품의 소유와 처분, 훼손과 파괴를 결정할 ‘권리’를 한 개인이나 국가가 행사하는 것은 정당할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어떤 법령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본인이나 타인의 소유인 예술 작품을 임의대로 처분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인가?”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르네상스. 2014)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책은 사라졌다가 돌아왔거나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문학 및 예술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 릭 게코스키는 저술가이자 고서적상이다. 그는 예술 작품에 대한 갖가지 일화를 통해 예술품의 상실, 작품의 가치, 작품의 권리에 대해 들려준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당하자 그림이 걸려 있던 빈자리를 보기 위해 더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그 자리에는 ‘프란츠 카프카’와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 같은 대작가들도 있었다.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곳에 몰려든 관람객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현상을 “과거의 모나리자가 강력한 현존이라면, 부재 상태의 그림이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사망하자 그의 친구들과 유언 집행인들은 그의 <회고록>을 불태워 버렸다. 그 이유는 바이런과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을 것을 추측되고, 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그의 회고록은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희곡 한 편과 <스티븐 히어로>의 처음 몇 부분을 불에 태웠고 (그중 몇 장은 그의 동생이 구해냈다) 제러드 팬리 홉킨스는 초기 시 가운데 상당수를 불태워버렸다. 이런 행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후세에 남길 작품과 폐기할 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파괴 행위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때다. 이런 일은 유언 집행인이나 친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p.104)

이와 함께, 19세기 초 영국 귀족 ‘토머스 브루스 엘긴’ 경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거대한 대리석 프리즈를 떼어내 런던으로 가져온 것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엘긴 경이 대리석상을 영국으로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 유물은 19세기 아테네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의심된다. 파르테논에 있던 대리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건축 재료로 재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재 ‘약탈’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이런 문화재의 ‘반환’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약탈의 결과로 문화 유물이 안전하게 보전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지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물을 돌려주는 열풍이 불게 되면 우리는 단지 ‘자국의’ 유물만 보유한 박물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편협한 지역 제일주의가 득세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다. 이 부분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뒷 표지에 “릭 게코스키의 책은 위트 넘치고 재미있는 동시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생생하고, 구수하고, 재미있고, 집요하게 글을 풀어 나가는 탁월한 이야기꾼” (스펙테이터), “활기가 넘치는 문학의 증언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라는 추천사가 과하지는 않다.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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