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투박해도 속은 단단한 시
겉은 투박해도 속은 단단한 시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5.21 2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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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시인의 <빛나는 단도>

"시간이 앞으로만 진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지나갈 뿐입니다. 단 한 번 살기에 세상이, 혹은 시간이 볼 수 있게 피를 묻히는 것이겠죠. 나는 그것을 언어의 피, 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말

[북데일리] 문학전문 기자 겸 소설가인 정 철훈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빛나는 단도>(문학 동네.2013)는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단단한 언어로 보여준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까만 파카를 입은 사내들이 희희낙락 쏟아져 들어올 때/ 하얀 오리털 하나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내 영혼이 보이는 것처럼/ 개에게 쫓기던 오리떼에게서 날아온 것처럼/(중략)// 오리털은 나의 영혼/ 위로받지 못하는 것들은 스스로 이렇게 날아 오른다/ 내가 나를 멀리 날려 보낸다는 것/ (중략// 영혼이란 게 있다면/ 영혼은 사람의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한다 해도/ 내 눈에는 오리털이 폭설처럼 날리고 있다."('나는 오리 농장을 견학하는 눈을 뜨고') 부분

그는 사내들의 파카에서 빠진 오리털의 움직임을 읽는다. 부유하는 먼지처럼 불안은 쫓기고 위로받지 못하는 영혼이어서 안주하고 싶은 건 아닐까. 시인은 스스로 질문한다.

"일회용 종이컵이 엎어진 채/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다/ 내용물은 경사면을 따라 길고 느리게 흐른다/ 흥건하게 젖어 나를 따라오는 흐름 혹은 흐느낌/ 내 뱃속에서 끄집어낸 창자같다/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길고 느리게 창자를 끄집어내는 기술이란 이런 것이다/(중략)//아무 이유도 없이 담겨 있다가/ 원망도 절규도 없이 쏟아져버린 저 이별의 기술."('이별의기술')부분

상처가 깊으면 통증이라는 늪도 나락이다가 종국에는 그것마저 끌어안게 된다. 육신의 일부처럼 고통도 느끼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흐른다. 시인은 삶에서 원망도 절규도 없이 이별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전 철희 씨는 시인의 시를 "투박한 껍질 속 알을 감춘 진주"같다고 전한다.

"난 가끔 손재주 많은 꼽추 친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평생을 집시 무리에 끼어 세상을 유랑하다/ 폭삭 늙어버린 그런 꼽추 말이에요/ 바이올린도 켤 줄 알고 계집 맛도 좀 알아서/ 황혼녘이면 무리들 가운데서 혼자 떨어져/ 달을 쳐다보며 남몰래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런 꼽추/(중략)// 우리는 어느날 한 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친구가 되는데 그 기념으로/ 서로의 비밀 주머니에서 빛나는 단도를 꺼내 손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피를 섞어/ 의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는 그런 꼽추."('빛나는 단도'-비비안나에게') 부분

표제작인 '빛나는 단도'는 시인의 솔직한 심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태생적인 불구로 삶이 고단할 수 밖에 없는 꼽추 친구에게서 죽음의 충동을 느낀다. 죽음의 충동은 바꾸어 말하면 비루한 삶이지만 삶의 애착을 떠올리게 한다. 애초에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에 거친 호흡과 투박함이 더 가슴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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