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맛 좋고 삶에 위안되는 책
글맛 좋고 삶에 위안되는 책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5.1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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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책 산문선<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북데일리] <나는 천천히 울시 시작했다>(봄날의 책.2013)는 성석제, 김연수, 김소연, 서효인, 등 전문작가를 비롯해 강광석, 박성대, 유소림 등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농민, 노동자 등 40명이 넘는 글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책은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 '이란 부제처럼 풍성하다. 한자리에 모은 글들은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가족과 고향에 관한 글이 많고 아련한 기억 속 장소와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깔스럽고 감동적이다.

GT451D는 트렉터입니다. 1955년에 태어났습니다. 금 색깔 왕자마크가 선명한 골드 스타 제품입니다.(중략) 그래서 GT(앞으로 경태라고 부르겠습니다. 경태와의 만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우스 농사를 짓던 형님이 농사를 짓게 되자 트랙터를 줬습니다. 그게 인연의 시작입니다.(중략) 잔병치레가 없었던 경태가 올해는 앓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작년 가을에 산비탈 밭을 올라가다 옆으로 넘어진 일시 사단인 것 같습니다.(중략) 더 단단해졌길 바라지만 지금 경태 나이가 사람 나이로 팔순을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다<워낭 소리>의 늙은 황소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앞으로 10년만 같이 있어 주길 바랍니다. GT451D는 주민번호이고 그의 이름은 강경태입니다.(강광식의'내 인생의 반려농기계'중에서p.38,p.39,p.40)

몸소 일하며 삶의 현장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글은 생생하고 감동이 크다. 오래된 농기계를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을 눈여겨 볼만하다. 자신의 성을 따고 이름과 주민번호까지 있는 낡은 트렉터를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은 일소를 바라보는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아카시아 꽃 지고 밤꽃 피는 6월이 오면 사람이나 소나 다 같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 합니다. 마을 늙은 암소 서너 마리는 더욱 고됩니다.(중략) 바깥양반은 쟁기 잡고 안사람은 소 이끌다 싸운 집이 한 두 집이 아니지요. 한밤 중 변소가다 소 우리 들여다보면 죽에는 입도 안대고 그때까지 헐떡대며 등에 식은 담을 비 맞은 듯이 흘리는 소를 발견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꼭 소의 눈가에 흐르는 희미한 물기가 눈물처럼 보입니다. ('박성대의 '소도 앓아 눕는 밤'중에서 p.45)

짧은 에세이에 담긴 풍경은 아릿하고 결코 그 여운이 짧지 않다. 오래전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던 아스라한 기억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불러일으키게 한다. 보성에서 우체부로 일하는 류상진, 농사지으며 소설 쓰는 최 용탁의 글들도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진다.

늦은 밤, 베란다에 나가 바로 앞 동 아파트를 보면 반딧불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게 보인다. 청정 지역도 아닌 이곳에 반딧불이가 서식할 리 없으니, 그것이 곧 가장들이 피우는 담배 불빛임을 깨닫게 된다. 가장들은 행여 자식들이 볼까, 베란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어두운 아파트단지를 무연히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운다. 모두 각자 쓸쓸한 도깨비불이 된채, 깜빡깜빡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조난 신호라도 보내듯, 천천히 담배를 피운다. 이제는 쉬이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도깨비 불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가장들은 도깨비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아이들의 눈치를 봐가며 베란다로, 베란다로 쫓겨나와 있다. 모두 어린 시절 잡히지 않는 도깨비불을 좇아 허방 같은 어둠을 헤매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이제 도깨비불이 되어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이기호의'반딧불이'중에서, p.120)

저자는 이 외에도 지금의 아내와 연애시절의 에피소드와 가난한 후배의 어머님 장례식장에서 부의금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 봉투에 이름을 쓰면서 망인을 기억하는 이름이 아닌 산사람을 기억하는 이름인 듯하다며 씁씁해하는 속내를 비추기도 한다.

청녀울은 이제 없다. 지도상의 이름은 백동으로 불린다. 과수원도 없다. 과수원이 있던 자리는 목초지로 변해 있다. 젖소들은 어슬렁어슬렁 그 옛날의 사과꽃과 복숭아꽃이 진 자리에서 킁킁 향기를 맡으며 풀을 뜯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참이 되었다. 과일가게 앞을 지나다 문득 그 안을 쳐다보면, 제일 후미진 자리에 할머니가 덤으로 앉아 계신다. 생전의 모습처럼 허름하시다. 과일가게 향기는 저 구석진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것! 잘 포장된 과일 바구니 안에서 나를 향하는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곧고 반듯하게 잘 사냐?"(이 정록의 '할머니의 광주리'중에서 .p.214)

조그만 여자 아이와 주렁을 짚고 풀밭에 걸터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는 흑백사진 속 노인의 모습이 선명하다. 속내는 감추고 잘 포장할 수 있어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도리어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나는 게 이런 모습들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지나간 시절은 추억이라고 하지만 삶의 질곡을 발설할 수 있는 것도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의 21번째 염색체는 3개다. 특별하게 태어났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피할 수 없으므로 받아들여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가지 의문이 날 지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서 효인의 '증명하는 인간' 중에서.p.310)

시인은 이 상황에서 '정말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러면서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고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며 인간성 회복을 좋은 문장으로 증명하고 싶다고 말한다. 책은 어디를 펼쳐 보아도 글맛이 좋다. 추억은 추억대로 삶의 끈끈한 풍경은 기분을 좋게 하며 무작위로 읽고 싶어진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는 법. 그럴 때 이 산문집 한 권쯤 갖게 된다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날까.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장맹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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