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판타지 `하렘물`의 세계
남성들의 판타지 `하렘물`의 세계
  • 북데일리
  • 승인 2007.03.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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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하렘(Harem)이란 이슬람권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이슬람교에서 남자의 부인들이 기거하는 곳을 하렘이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남편을 제외한 외간남자의 출입을 엄금하는 곳입니다. 실제로 매우 유명한 이슬람식 황궁인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왕의 후궁들로 가득한 하렘에 몰래 출입한 남자를 하렘의 한 가운데에서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화에서 말하는 하렘이란 무엇일까요? 일부다처제라는 개념을 그대로 생각해보면 됩니다. 주인공 남자가 있고, 그 남자를 둘러싸고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형태입니다. 이 장르는 일전에 <엠마>를 언급하면서 잠깐 이야기한 메이드물과 더불어 성인만화가 매우 선호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만화에서도 하렘물은 많습니다. 단 이럴 경우 성인 대상의 작품과는 달리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조절하긴 합니다. 성인 작품에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애 장면은 빼고, `눈요기` 라고 지칭되는 여성들의 노출 장면을 틈틈이 끼워 넣습니다. 물론 단순 노출뿐 아니라 적당하게 남자주인공과의 신체접촉 상황을 수시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해수욕이나 노천탕(대개는 남녀혼탕)처럼 노골적으로 누드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에서의 에피소드가 빈번히 삽입됩니다.

하렘물에 도통한 작가라면 <아이즈>나 <전영소녀>를 그려낸 카츠라 마사카즈나 <러브인러브>(원제 러브 히나)나 <아이 러브 서티> <마법소년 네기마> 등으로 하렘물의 경지를 끌어올렸다는 아카마츠 켄 등이 유명한 작가입니다. 대부분 남자 작가들이 유명하지만 <딸기 100%>의 작가인 카와시타 미즈키는 여자작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렘장르를 그려내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카츠라 마사카즈나 카와시타 미즈키는 성장기 소년 소녀들의 로맨스를 하렘의 형식을 빌어서 묘사해낸 작가들이고, 아카마츠 켄의 경우 하렘물의 형식을 빌어 브레이크 없는 코미디를 그려내는 작가입니다. 아카마츠 켄이나 카츠라 마사카즈의 경우에는 차후에 별도로 이야기를 가져보겠습니다.

후지시로 타케시의 <소녀왕국 표류기>는 상당히 노골적인 설정을 지닌 작품입니다. 가출한 남자 주인공이 탄 배가 폭풍에 휩쓸려 난파하고, 그는 아이란도라는 섬에 표류합니다. 그 섬은 섬 바로 앞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절대로 섬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육지와 단절된 공간이죠. 마치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밀실처럼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라는 설정을 만들면서 공간을 한정시킵니다. 게다가 이 섬의 남자들은 12년 전에 모두 바다에서 죽고 이 섬에는 오직 여자들만이 살아남아있다는 설정. 그야말로 완벽한 하렘물의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실 전형적인 하렘물처럼 남녀 간의 로맨스를 노골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100년 가까이 육지와 교류가 없이 떨어져있던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사건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카마츠 켄의 <러브 인 러브>에 나오는 파랄라케스섬 에피소드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오히려 섬에 넘치는 여자아이들은 태어나서 남자라는 `생물`을 전혀 본 적이 없기에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쉬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뭐, 어째서 12년 전에 남자들이 전부 죽었는데 그 때 남겨졌던 갓난아기들이 모두 여자아이이고 남자아이는 단 한 명도 없을까 라는 질문은 우문이겠군요. 다른 남자아이가 있다면 육지에서 건너온 이쿠토가 주인공이 되는 하렘물 자체가 성립이 안 되겠죠.

하렘물은 딱 그만큼의 눈높이로 작품을 대해야 합니다. 괜히 진지하게 보다가는 `이거 뭐야` 라고 하며 던져버리기 딱이죠. 특히 여자들이라면 하렘장르에서 끊임없이 보여지는 여성의 상품화에 불쾌감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자들은 여자들의 장르라고 불리는 야오이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야오이는 여성들을 위한 하렘물이라고 볼 수 있죠.)

마지막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덧붙이면 여태까지 제가 본 모든 장르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하렘장면은 신필(神筆)이라 불리는 중국의 무협작가 김용의 <녹정기>에서 나왔습니다. 신필이라 불린 김용은 `더 이상 이 작품을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없다`라는 이유로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기녀의 아들로 청황궁의 환관이 된 위소보인데, 그는 한 침대에서 여자 여섯을 동시에 겁탈합니다. 그리고 청의 공주와 러시아 공주와도 정을 통하고 나중에는 일곱 부인을 데리고 삽니다. 아니 김용의 <녹정기>가 아니더라도 하렘물에 대한 관심은 더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에도 김만중의 <구운몽>도 곰곰이 짚어본다면 일종의 하렘물입니다. 하렘이란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판타지처럼 풀어내는 배설구와도 같은 장르입니다.

소녀왕국표류기 / 후지시로 타케시 / 2004 ~ 9권 연재중 / 삼양출판사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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