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냄새가 물씬 나는 시
땀 냄새가 물씬 나는 시
  • 장맹순
  • 승인 2014.05.0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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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윤석 시집 <멍게>

[북데일리] 창원의 어시장에서 냉동 생선 상자를 나르며 일용직 잡부가 되어 돌아온 성 윤석 시인의 시집 <멍게> (문학과지성사. 2014)엔 온갖 수산물들이 풍성하다. 이번 시집은 비린내와 땀내로 흥건하다.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멍게')

시인은 멍게와 자신을 비교하다 한 중도매인이 하는 말에 난처해한다. 어시장에서 과거의 이력은 그리 중요치 않다. 머리가 아닌 몸을 쓰며 살아야 하는 어시장 잡부의 현실을 보여준다.

"떠난 후 다시 돌아온 짐꾼들이 얼어 죽은 생선들의 입을 모아/ 바다의 비명을 들어보려 헤드셋을 낀 채 바다가 만든 방에서 일하고/ 바다가 꾸려준 침대에서 잠이 들 때/ 바다에 돌아오면 푸른빛을 얻는가"('바다악장')부분

농사꾼의 밥은 논밭이 먹여주고 어시장 사람들은 바다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산다. 새벽에 나가 잡아 얼린 생선들을 손질하다 죽은 생선가시와 이빨에 찔려도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게 독을 품지 않는다. 푸른빛과 비릿한 냄새가 밥이고 생이기 때문이다.

"마산 수협공판장 1판장/ 상어가 누워 있다/ (...)상어는 가끔 오랫동안 굶는다/ 굶어 죽은 상어는/ 눈을 갖는다/(...)상어는 질주로 세상을 가른다/ 작은 놈은 먹어 치운다/ 가을 추석 대목이 가까워지자/ 상어 눈을 한 사내들이/ 돌아온다/ 오래 굶은 상어들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다른 이의 짐을 싣고 질주하는 것뿐이다/ 이들도 가끔 오래 밥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신다/ 상어는 가끔 이빨을 드러내고/ 닥치는대로 일행들을 물어뜯는다."(상어')부분

수북한 오징어 상자 사이에서 상어를 보는 시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사나운 상어의 본능에서 어시장 사내들의 삶을 들춰 낸다. 무거운 생선상자가 그들의 밥줄이다. 고달프고 냉정한 일상엔 밥보다 술이 먼저다. 상대를 닥치는대로 물어 뜯어야 제가 사는 그들의 강팍한 삶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그 삶을 선택한 시인이 무척 궁금하다.

새벽이 되자/ 나는 버린 1.5톤의 책들속 멸치 떼처럼 튀어 오르던/ 명문장들을 지우려 애썼다네/ 나 이 바다로 오기 위하여 책을 버렸네/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수천의 시들을 버리는데/ 휠덜린이 요양원 창가에서 내다보고/(...) 나 책 한 권 가진 게 이제 없다네 이 장례식엔/ 아무도 조문 오지 않고 킬킬/ 빨간 딱지를 가지고 온/ 집달리만 도대체 책들을 어디나 버렸냐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네."(책의 장례식')부분

그는 한때 벤처기업 사장이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이었단다. 그가 어시장 잡부가 되어 몸 쓰는 일을 하고 있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멸치 떼에서도 명문장을 떠올리는 시인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고독해야 한다는 휠덜린의 말을 고민한 걸까. 책과 수천의 시들을 버리고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바다로 간 사연은 무엇 때문일까?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내 옛 첫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복사꽃 그늘에서 바다로 걸어 내려간 일이거나/ 흐려진 바다 상회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노가리 코다리 명태 황태 북어로 따로 이름 불리며/ 뜯기거나, 얼리거나, 바람에 실리거나./ 얼어 바닥에 내 팽개쳐지는 일이거나/ 가끔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횟집 수족관 유리에 비치는 것이었는데/ 나는 당신이 아는 사랑을 나에게 얘기해 주길/ 나는 속앓이도 접고 바랐었는데/ 오늘은 첫 마음 같은 이름 그대로 남고 싶어/ 불러보는 명태.('명태') 전문

시인은 냉동 창고의 꽁꽁 언 명태를 본다. 삶도 경로에 따라 달리 불리어지는 명태처럼 시인도 이름 앞의 수식어를 떼고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뜯기거나, 얼려지거나, 바람에 실리거나, 내팽개쳐 지더라도.' 들려주는 말들이 마치 우리 생처럼 적나라하다. 시인에게 바다는 삶의 현장이다. 시 수천 편을 버린 뒤 다시 생생한 시를 건져 올린다. 삶이 무료하다면 땀 냄새 비릿한 이 시집을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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