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공항엔 효모 냄새가 난다
유럽 공항엔 효모 냄새가 난다
  • 장맹순
  • 승인 2014.04.2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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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에세이 <설탕의 맛>

"이번 나의 여행 목적은 내일의 장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폐허를 발견하는데 있다." - 본문에서

<설탕의 맛>(쌤앤파커스. 2014)은 개성적인 소설 문체로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 김사과의 첫 에세이다. 그녀가 밝힌대로 여행은 전혀 달콤하거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책은 그녀가 2007년 뉴욕부터 포르투, 베를린, 여러 도시를 오가며 보고 경험한 단상들을 담아 놓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는 무겁고 사색적이며 우울하다. 뉴욕의 집주인 헨리얘기, 불편하지만 호감가는 베를린의 풍경, 미국에 대한 얘기들이 이어진다.

나는 사람들의 공포를, 헨리가 보는 것을, 여전히 이 도시를 가득 채운 공포를 본다. 하지만 여전히 상상할 수 없다. 여전히 나는 이 도시를 이해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떤 식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지, 지금 내 눈앞에서, 그 모양, 그 색, 그 냄새, 그 소리, 그 소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볼 수 있다. 알지 못하지만, 묘사할 수 있다. 내 시야와 귀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나는 언어 속으로 구겨 넣을 수 있다. (...) 이곳에서, 공포는 외부에 있다. 그것이 뉴욕과 서울의 다른 점이다. 서울에서, 공포는 내부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멀리 떨어진 이 두 도시의 공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 국제화다.('혼자서'p.56)

그녀는 9.11테러를 목격한 후 외상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집주인 헨리를 통해서 전쟁의 공포를 읽어낸다. 도시의 건물, 그 속에서 보이지 않게 흐르는 공기처럼 불안의 기운을 날카로운 촉으로 감지한다. 독자를 보이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내부로 끌어들여 색다른 여행법을 제시한다.

견딜 만한 더위 속에서, 견딜 만큼 땀을 흘리며, 나는 견딜 만큼 뜨겁게 달구어진 맥북을 두드린다. 견딜 만함. 그것은 현재의 베를린에 관한 적절한 수사다. 한낮, 엄청난 열기로 가득한 전철 한구석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검은 옷의 남자는, 자세히 보면 온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은 해탈에 이른 듯 평온하다.(...) 최근 내가 발견한 베를린의 특징 중 하나는 온 도시에 깨진 병이 나뒹굴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 도시가 가진 험악함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그저, 유리병은 깨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현에 가까워 보인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충 그런 식의 운명적인 뉘앙스가 거기에 있다. 깨부수려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유리병은 원래 깨지는 거니까.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동베를린에는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인이 슬리퍼 없이 자기 집 안을 돌아다니듯이, 많은 젊은이들이 맨발로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그러다 유리조각에 발을 다치지 않을까? 물론 맞다. 맨발로 다니다 보면 발을 다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내가 얼마 전에 맨발로 춤을 추다가 발바닥이 찢어진 것처럼 말이다.'('견딜만 함'. p.157)

​ 그녀는 서문에서 "여러 도시에 머문 기억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행도 생활도 아​닌 애매한 시간 이었다"고. 책에는 여러 도시를 머물면서 느낀 공통점을 모든 서구의 대도시에서 이루어졌고, 도시들이 하나같이 닮아있고 심지어 서울도 그렇단다. 닮는다는 건 개성을 잃어버리고 획일화 돼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베를린 여행에 호감을 보인다. 인종차별과 불친절, 쾌적하지 않은 환경, 에어컨도 없는 카페의 더위가 캘리포니아의 표백한 듯한 친절보다 오히려 편안했고 유럽의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다른 면을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보편적인 것보다 다양함을 추구하는 여행자가 맞지 않을까.

​ 유럽 공항에서는 효모냄새가 난다. 상하이 공항에서는 기름 냄새가 난다. 여름 인천공항에서는 식초냄새가 난다. 그리고 JFK에서는 페브리즈 냄새가 났다... 아 아 그게 미국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페브리즈 냄새의 나라로 온 것이다 상쾌하고 은은한 인공향의 나라(...) 나는 그것에 익숙하다. 나는 미국식으로 교육된 세대다.('오늘의 뉴스'p.193)​

​ 나는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가 싫다. 비명과 광고와 대답과 질문과 여행객과 히피와 상점으로 가득한 그 거리가. 왜냐고? 거긴 오직 슬픔뿐이니까. 오직 베개를 적시는 눈물뿐이니까. 하지만 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라는 걸. 이게 내가 살아온 삶이라고. 그리고 삶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이 거리를 통과하여 살아가야 한다. 살기를 원한다면. 하지만 도대체 삶이란 뭔가? 사람들은 더 이상 살지 않는다. 소유한다. 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갖게 되었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지나치게 충분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소비자일 뿐이니까. 우리는 그저 소모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게 우리들의 삶이다. 그저 쓰레기통에 처박기 위해. 불태워버리기 위해, 모든 것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맛', p.231)

​ 그녀는 책에서 미국을 설탕 맛에 비유 한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삶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겠지만, 세상을 글로벌 비즈니스가 쌓아올린 쓰레기더미로 표현하는 이 책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달콤하지 않다. 여행에 대한 어떠한 기대와 환상도 없다. 시고 떫고 쓰다. 그만큼 뒷맛이 개운치 않다.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행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이 클 수도 있다. 소설 같은 수필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솔직했고 부러우면서도 불편했다. 작가 김 사과는 오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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