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위한 따뜻한 위로 노래
여행자 위한 따뜻한 위로 노래
  • 장맹순
  • 승인 2014.04.1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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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길귀신의 노래>

"어느 날 내가 한적한 바닷가 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쳤다. 그가 물었다. 진실로 사랑하는 이와 마음에 드는 시 세 편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스무 살 아래 나의 답은 갈등없이 시 세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네가 쓴 시 세 편 과 포도 세 송이 중 어느 것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하는가? 쓸쓸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결정된 것이었다."-시인의 말

[북데일리] 이 책 <길귀신의 노래. 곽 재구> (열림원. 2013)은 지난 십수 년간 와온에 머물며 길 위에서 들은 길 귀신(시의 신)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마다 시인이 걸어온 인생, 와온卧溫(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 마을에 대한 애정, 외국여행길에서의 서정이 진하다. 특히 시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미소짓게 한다. 책에는 떠돌이 시인의 삶과 세상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와 사진이 실려 있다.

​ 지하철 풍경이었다. 오후의 지하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자리에 앉은 승객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내 바로 앞의 할머니는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고 그 옆의 아주머니는 갓 꺽은 들꽃 한 묶음을 지니고 있었다.(...)나는 이 지하철 안의 풍경이 무슨 영화촬영이라도 하기 위해 연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지하철 안의 거의 모든 승객이 책을 읽거나 꽃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 책 꽃 책, 또다시 꽃 책 책 꽃 꽃 꽃 책 책 책 꽃…​….(37쪽)

​ 시인이 모스크바 여행 중 본 장면이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지하철 풍경을 보고 놀란다. 그들은 비록 생필품과 빵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고 공장 노동일에 고단하지만 꽃과 책을 사랑한다. 시인은 도서관 같은 지하철 안 모습에서 러시아의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한다. 헌책방 주인이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주는 모습에서 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푸시킨을 떠올리게 한다.

"반딧불이들이 모여든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호숫가의 두 칸 흙집 새 아기 울음소리가 우련 짙다/ 별똥별 긴 꼬리에서 배내똥 냄새가 난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찰랑찰랑 호수를 채운다."​('적빈 寂貧'.45쪽)

​이 시는 인도 호숫가 움막집(아디바시) 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한 무리의 반딧불이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즉석에서 썼다고 한다. 반딧불이 앉은 나무를 보고 크리스마스트리 같다니 그럴 듯하다. 이 말끝에 생각이 난다. 반딧불이를 보고 누군가는 그랬다지. "누가 반딧불이 꽁무니에 건전지를 달아 놓았을까?" 가난하지만 따듯한 평화를 사랑하는 그들처럼 시인도 어린 시절 기억과 와온이 그렇지 않았을까.

​시인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자전거 뒷자리를 얻어 타던 기억을 한다. 자전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선생님의 등을 잡았던 일, 낡은 양복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싫지 않았고, 선생님의 도시락 보자기를 깔고 앉아 민망하기도 했지만 학교 가는 내내 엉덩이가 따듯했다고 말하는 시인의 미소가 그려진다. 해넘이가 아름다운 와온은 박완서 작가와도 연이 깊다.

"어느 해 봄 이곳 바다에 들른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개펄에서 일하는 아낙을 바라보며 '봄날의 꽃보다도 와온 바다의 개펄이 더 아름답다'는 얘길 했거니와 이는 휼륭한 육체노동을 하는 갯마을 아낙들의 삶에 대한 헌사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쓴 시 한 편이 농부가 수확한 감자 한 망태나 토마토 한 광주리 같은 쓸모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심사였으니 평생 글을 써온 선생에 있어서는 그 소회가 오죽할 것인가. 밀물이 되어 노동을 마친 아낙들이 햇살과 바람에 그을린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을 바라보며 선생은 내게 "나도 이곳에서 좀 살다 갈까 봐."라고 얘기 했는데(...) 만약 선생이 오래 살아 와온 바다에서 널을 밀었다면 선생은 평생을 하얀 손가락으로 글을 쓰며 산 콤플렉스를 씻었을 것이다"(101쪽)

"바라나시 근교 사르나트 마을을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보리밭 길 사이에서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또 다른 아이를 만났지요. 형과 동생이었습니다. 형이 여덟 살 동생이 다섯 살쯤 돼 보였지요.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형이 또렷한 목소리로 나마스테! 인사를 되받았지요. 나와 그 둘은 그냥 스쳐갈 뻔 했습니다. 나는 잠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뒤쫓아 갔습니다. 그들의 서너 걸음 앞에서 비스킷 한 봉지를 꺼내 형에게 주었습니다."(285쪽)

​ "바로 그 순간 형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NO! 나는 이 사태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비스킷을 선물로 주고 싶단다. 나는 동생의 손에 비스킷 봉지를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 때 다시 형의 목소리가 떨어졌습니다. NO!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나는 두 형제가 사라져 간 보리밭 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습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누군가에게 돈을 건넸다 거부를 당한 유일한 순간이었지요. 그날 이후 나는 구걸하는 인도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속의 알 수 없는 증오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혼잡을 넘어 혼돈에 가까운 인도의 삶과 풍경들이 비참한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286쪽)

책에는 이 외에도 세상 곳곳에서 만난 인연과​ 추억의 실타래들로 가득하다. 시인이 쓴 기행산문집< 포구기행>이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간 시인의 고뇌와 사색에 대한 흔적이라면 다른 책< 예술기행>은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젊은 여행자인 시인의 내적 성숙과 온갖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길 떠나는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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