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의 유혹, 숨겨진 `나비`의 두려움
본능의 유혹, 숨겨진 `나비`의 두려움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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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날아오른 나비의 날갯짓이 허리케인의 말발굽으로 진동하더니, 이제 그 ‘나비’가 직접 바람과 비를 몰고 태풍으로 오신다.

세렌게티 평원을 지나 히말라야 고산을 넘어 1억5천만년의 시간을 날아온 나비 한 마리가 나희덕 시인의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스스로 화석이 되지 못하여 시간의 그림자를 무늬로 새긴 나비는, 때로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야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배추나 쐐기풀 같은 야채가 되기도 한다.

혼돈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 비밀을 쥐고 있을 나비의 무늬에 새겨진 문자를 읽어보자.

친구는 마흔이면 불혹일 줄 알았는데 욕망의 끊임없는 유혹으로 혼란스럽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갈무리해둔 `거시기`한 본능의 유혹은 견디기 어려운가 보다. (써걸놈, 동네사람 알까 무섭네 그냥, 이양 들키지나 말지......)

시인 역시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때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며 자신의 이런 습관을 건조증에 걸린 것은 아닌 지 의심하면서도, 그건 `유목(또는 유혹의) 피`를 잠재우는 것일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러나 이런 건조한 삶에의 지향도 결국 젖어있는 것들을 향한다. 생각해보면 친구의 늦바람도 습기를 찾는 물고기의 본능으로 설명해도 좋겠다. 그 습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리라.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로 시작되는 `여, 라는말`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바위도 아니고 섬도 아닌 수많은 이름의 여에 스며든 기억과 그리움을 한 마리 새가 되어 맴돌면서, 그 젖은 날개에서 여, 라는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이는 다시 풍장의식을 통해 향기를 잃는 대신 불멸을 얻고자, 또는 잊고자 했던 것들로부터의 반란의 함성으로 들려온다.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이/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풍장의 습관`중에서)

향기를 거세한 마른 꽃에서 향기가 솟아오르고, 그 향기가 스며드는 곳은 젖은 그리움이기에 벽에 걸린 꽃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나비가 된 시인을 만나게 된다.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봄비를 건너간다/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그 고요한 날갯짓에는/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그는 남몰래 가졌을까/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새로 지어진 옷’)

시인은 또 초승달을 보며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손/다시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에 비록 사라질지언정 다시 잡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에게 젖은 손을 내민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있더니/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말 건네려 해도/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그보다 일찍 오면 흰꽃도 볼 수 있으려나//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먼 시간을 날아 이제 막 창가에 앉은 흰나비의 고요함. 곧 무언가가 올 것만 같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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