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장] 감정은 경계를 너어 연대한다
[명문장] 감정은 경계를 너어 연대한다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3.1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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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소설 속에서  한 편의 작은 에피소드나 액자 소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은희경의 신작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14)에 소개된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의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외피 뒤에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캐내려 하지 말고 그 순간의 온기에 온몸을 맡기라는 충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P.115~P.116)


 

* 로맹가리 <새벽의 약속>중에서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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