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히 사약받은 `인간 송시열의 삶`
당당히 사약받은 `인간 송시열의 삶`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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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3월, 한 일간지는 충북도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생가에 대한 문화재 지정 여부를 놓고 검토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해당 기관 관계자는 "우암 생가를 둘러싸고 종중의 소유권 분쟁이 법원에 계류 중이라 지정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결론나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종중은 해당 도를 통해 "우암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이나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친일논란에 휩싸인 인사들의 생가도 당국의 지원 아래 복원되는 상황에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의 생가가 보존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세간의 평이 양극단을 달리는 우암 송시열. 일각에서는 그를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라며 `송자(宋子)`로 극존칭을 쓰는 반면,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의 골수 신봉자`라며 `송자(宋者)`라고 낮추어 부르고 있다.

최근 출간된 소설 `송자소전(宋子素傳)`(2005. 김&정)은 이같은 극단의 평가를 제쳐두고 송시열의 인간적인 모습을 추적해간다.

저자 김선주는 "송시열이 극단의 평가에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일제에 의해 상당 부분 폄훼된 것이 원인으로 작용됐으며, 이 책은 무엇보다 유학자 송시열의 인간적인 면을 파고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소설은 송시열이 청나라와 화의가 이루어진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을 때, 송시열의 친구인 송준길이 그를 찾아와 다시 정계 진출을 권하는 부분부터 시작된다.

평생 학문에 힘썼다

송시열은 인조 11년, 그의 나이 26세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인조를 비롯한 후대 임금들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8차례나 사양한 채 학문 탐구에 힘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아첨과 아부를 일삼고 있는 혼탁한 조정에 나가고 싶지 않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책 속에 파묻혀 학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이들을 위해 책을 쓰고 비문을 짓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훗날 귀양지에서도 `주자대전차의(朱子大戰箚疑)`의 증보판을 썼으며 "모든 이가 주자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사악한 말과 행동이 더 이상 횡행하지 못할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주변 학자들과 학문에 대해서 논할 때 상대방의 주장에 문제가 있으면 가차없이 이를 지적했으며, 잘못된 의견을 두둔하는 이들 조차도 가까지 하려 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한 관리에게 "그대여 깨끗한 물에는 손을 씻지 마라. 그대의 손과 옷소매로 인해 물이 더러워지느니"라고 읊었다는 얘기는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곧은 성품으로 일관했다

송시열은 대쪽같은 성품으로 옳고 그름을 분간하려 했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하고 비리를 저지르며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가장 경멸했다. 또 권력자에게 아부와 아첨을 일삼으며 정직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제자였던 봉림대군(효종)이 왕위에 올라 재차 사부의 자리를 청했을 때 송시열은 왕자의 스승인 것과 임금의 스승이 되는 것은 다른 의미라며 효종의 청을 사양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과 현종, 숙종 등 3대 임금의 스승이자 `대로(大老)`라고 불릴 만큼 그 위상이 높았다.

송시열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면서 `인통함원박부득이`(忍痛含寃迫不得已, 분통을 참고 원한을 품은 채 서두르며 그만둘 수가 없다)를 마음 속에 새기며 효종과 함께 북벌론에 대한 꿈을 펼쳐갔다. 효종이 조금이라도 정사에 소홀해지는 기색이 보이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상소를 올려 직언을 했으며 19가지에 달하는 건의안을 냈다. 숙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임금이 지켜야 할 13가지의 사항을 낱낱이 적어 내는 등 쓴소리를 참지 않았다.

정직하고 곧은 성격때문에 반대파의 모함을 적지 않게 받았다.

효종의 장례때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발생한 예송논쟁에서 1년설을 주장하는 등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으나 이후 반대파의 탄핵이 줄을 이었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때 송시열은 "내 일찌기 사람을 해한 바 없고 학문에 대한 견해와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을 뿐인데 어찌 이리도 그 원한이 깊고도 깊단 말인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도리에 따라야 하거늘." 하며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삶의 고통을 감당해냈다

그는 항상 적게 먹고 적게 자며, 굶주림을 참고 글읽는 생활에 열중했다. 특히 `야식(夜食)`은 배고픔만 같지 못하다며 저녁을 먹은 이후에는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물건을 무섭도록 아껴 썼고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으나 글을 쓰기 전에는 항상 2~3잔 정도 마신 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벼슬을 마다한 채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동안 반대 세력들의 계속되는 모함에 의해 귀양길에 오를 때는 수행하는 하급 관리들의 노고를 걱정했다. 귀양지에서는 집 주변에 가시울타리 치는 일을 스스로 돕기도 했다.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였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려고 할 때, 예전 효종이 송시열에게만 하사했던`수찰(手札)`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리지만 송시열은 이를 거부한다. `수찰`은 효종이 송시열과 북벌론 등 주요 정사를 논의하면서 그에게만 비밀리에 하사했던 것으로 왕명이 함께 수록되어지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은 수찰은 핑계에 불과하며, 숙종의 숨은 의도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당당히 사약을 받는다.

죽기에 앞서 송시열은 그의 제자 권상하에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같은 도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므로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송시열은 83세때 삶을 마감했으며 생전에 제자가 9백여명에 이르렀고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 이도 60여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저자는 "송시열은 조선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당쟁의 시대에 우뚝 선 거인이었다"면서 "항상 올곧은 삶인 `직(直)`을 내세웠던 우암 만의 영광과 고뇌의 삶을 오롯이 녹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 송시열 초상화) [북데일리 정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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