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가을 예감'
헤르만 헤세의 '가을 예감'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3.08.22 12: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속의 명문장]<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중에서

[북데일리] 뜨겁던 여름이 끝나가는 이즈음. 한낮에 내리쬐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이미 서늘해진 공기를 느낄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웅진지식하우스. 2013)에 수록된 ‘여름 편지’를 소개한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읽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친구여! 너무도 멋지고 조금은 별난 이번 여름도 마침내 끝나 가는가 보네. 벌써 산들은 9월이 왔음을 알리는 저 보석 같은 빛을 다시 띠고, 너무도 명료한 자태를 보이며 공기처럼 가볍고 엷고 달콤한 코발트 빛으로 빛나고 있어. 아침이 되면 초원은 다시 촉촉한 기운을 띠고, 버찌나무잎은 벌써 자줏빛으로, 아카시아 잎은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이 느껴지는군.(중략)

이곳 남쪽은 예전과는 다른 기이한 여름이었네. 참으로 이상한 폭우가 쏟아졌거든. 한번은 폭우가 나흘 동안이나 계속되고 폭풍도 몹시 심하게 불었다네. 이따금 보기에 아름답기도 했지만, 견뎌내기에는 쉽지 않았네.(중략) 이러저러한 걱정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이번 여름은 더욱 격렬하고 자극적이었지.(중략)

이맘때가 되면 서서히 기울어가는 여름의 대기 속에는 얼마간 명료한 기운이 서린다네. 화가들이 ‘그림 같은’이라는 말을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는’으로 쓰지 않는다면, 나는 그 같은 대기의 모습에 ‘그림 같은’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군. 이 명료함을 과연 붓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중략)

식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지. 꽃, 나무, 풀 모두가 가을을 예감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을 뿐 아직 본격적인 가을의 현란하고 강렬하고 환희에 찬 색들을 펼쳐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를 띤 적이 없다네. 지금 정원에는 1년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꽃들이 피어 있지. 타오르는 불꽃처럼 빨간 석류가 여기저기 피어 있고, 달리아와 모란, 백일홍, 과꽃, 그리고 매력적인 붉은 푸크시아도 보이는군! 그러나 늦여름과 초가을의 다채로운 색을 상징하는 꽃은 아무래도 백일홍이지!

막 꺽은 다양한 색깔의 백일홍 꽃다발처럼 건강하고 강렬하게 빛나는 꽃은 다른 꽃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그 현란한 빛깔, 환호하듯 강렬한 색깔. 진하디진한 노란색과 오렌지색, 웃음을 터뜨리듯 쾌활한 빨간색과 경이로운 자줏빛, 이런 색들은 가끔 순진한 시골처녀들이 일요일에 매는 리본이다 나들이옷처럼 보일 수도 있네.(중략)

친구여, 꽃잎의 뒷면도 세심하게 들여다보게! 줄기가 꺽이는 순간 갑자기 그 꽃잎으 그늘진 면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그 때 색의 유희가 일어나며 천국으로의 여행이, 점점 더 정신적인 것으로 넘어가며 죽음에 가까워지네. 그것은 화관花冠에서 보다 그 죽어가는 꽃잎의 그늘진 면에서 더 향기롭게, 더 놀랍게 이루어진다네. 자네는 이런 것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알지.“ (p.91~p.97)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